시인 김지하의 미학강연을 읽다 보면 헤비메탈 내지는 데스메탈에 대한 언급이 종종 눈에 띈다. 노(老)시인의 입장에서 보건대, 젊은 세대의 음악적 감수성을 대변하는 양식으로 헤비메탈의 급진적인 카오스 상태가 도드라져 보였던 듯하다. 작금의 산문시 패턴의 유행 또한 율격이 망가진 헤비메탈적 리듬의 횡행 탓으로 보는 시인의 관점이 매우 비판적이긴 하되, 그 어조에서 딱히 ‘그런 못된 음악 들으면 안됩니다!’하는 어르신의 훈계가 전면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시인의 전집에서 조금 인용해본다.
"우리 세대가 이루지 못한다 해도 천지공심, 이것을 믿고 자꾸 우리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뒤에 오는 세대들, 지금의 젊은이들, 데스 메탈에 미쳐 있는 애들 말이에요. 그 애들의 가치관의 핵심으로 자리잡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 애들 메탈도 율려춤, 기춤, 풍류춤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려를 하는 것입니다. " -김지하 전집 제3권 ‘미학사상’(실천문학사)에서.
음악에 해박한 ‘요즘 애들’에게 헤비메탈은 한물 아니라 두 물 이상 건너간 구닥다리 음악에 속한다. 그 빡빡하고 판에 박힌 구조와 유치찬란한 세계관은 소위 미니멀하고 쿨한 90년대 이후의 음악에 비하자면 시대착오적 망상에 가깝다. 헤비메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80년대의 마니아에게 어느 밴드의 누가 기타를 얼마나 빨리 치느냐, 보컬이 몇 옥타브까지 고음이 나오느냐 하는 것은 음반을 고르는 중요한 척도가 됐었다. 헤비메탈은 각 파트별 악기들의 기술적 노하우를 극대치로 끌어올려야만 가능한 음악인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블랙 새버스 등에 의해 처음 양식화된 헤비메탈은 다양한 서브 장르로 분화하다가 1990년대에 이르러 급작스레 퇴보하고 만다.
김지하 시인이 실제로 어떤 음악을 일러 헤비메탈이라 부르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청산유수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시인의 육성에 딸려 나온 헤비메탈이란 단어가 생경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약간 머쓱하기도 하다. 그래서 문득 오래도록 듣지 않던 헤비메탈 음반을 꺼내 듣게 되는데, 단순히 음악적 양식뿐 아니라 정조와 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김지하가 얘기하는 ‘흰 그늘의 미학’의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여겨지는 블랙 새버스가 가장 먼저 손에 닿는다. 1970년에 발표된 그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이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음반은 록음악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걸작으로 통한다. 헤비메탈뿐 아니라 전자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음색과 사운드를 급진적으로 펼쳐보였다는 점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업적에 비견할 만한 가치를 지녔다. 더욱이 도저히 미성이랄 수 없는 둔탁한 목소리로 오묘한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오지 오스본의 보컬은 향후 카피가 불가능한 헤비메탈계의 지존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앞서 ‘흰 그늘의 미학’과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말을 했거니와, 블랙 새버스의 음악이 희한하게 김지하의 시와 공명하는 바가 있어 다소 놀랍다. 물론, 세상과 맞서 날선 목청을 곧추세우던 시인의 젊은 시절 작품들이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여기 그 누구도/ 그 흔한 예수마저도 믿을 수 없는/ 내일은 반드시 수염을 깎겠다는 나의 작은 결심조차도/ 아서라/ 못 믿을 거라, 아 나직나직한/ 바람 속 죽은 흙들이 가슴에 고여 내려/ 마주잡는 손바닥에마저/ 아서라/ 돌이 자라는 거리,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핏발 선 내 뜬눈의 거리" 김지하, ‘지옥·2’에서
젊은 시절 김지하의 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건 어둠과 죽음,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거대한 환영처럼 일렁이는 자유와 해방에의 신념이다. 젊은 김지하는 출구 없는 어둠 속에서 빽빽하게 날이 선 고행의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걸어갔다. 날이 밝으나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해가 기울었으나 생명은 요지부동 이어지는 피의 노정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길고 긴 암흑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생애를 부언하는 건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정말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30여년이 지난 현재, 백발과 노구를 이끌고 낮고 느린 음성으로 생명과 율려를 얘기하는 그의 발성법에 지난했던 세월의 더께가 완곡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붙어있는 ‘저항시인’ ‘민족시인’ 등의 꼬리표를 떼고 그의 시를 읽어본다. 배경음악은 이미 말했듯 블랙 새버스다. 그 둔중한 리듬과 끈적한 발성이 사뭇 강렬한 데시벨로 겹쳐 뇌리를 흔든다. 텍스트의 맥락을 떼어놓고 언어의 질감이나 리듬감만으로 파악한 경우지만, 한 편의 시가 쓰여지던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수 십 년이 지난 시점에까지 소급해서 일차원적으로 판독하는 건 시의 생명력을 반감시키는 일이다. 유신시대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을 30년이 지난 지금, 한 편의 시를 통해 고스란히 상기시키기 보다는 이미 쓰여진 시 속에서 현재의 또 다른 생성의 기미를 발견하는 게 내게는 훨씬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중요한 건 김지하의 시와 블랙 새버스의 노래가 맞물려 드리워지는 ‘깊고 어두운 빛’과 ‘희고 투명한 그늘’의 이중적인 혼재에 대해서이다.
금속성의 둔중한 사운드가 시종일관 지속되는 헤비메탈은 절제를 모르는 음악이다. 또는, 절제하는 순간조차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의 정념들이 화끈한 불꽃처럼 튀어오른다. 김지하 시인의 초창기 시를 절규와 원망과 분노의 시라고 했을 때, 그의 리듬은 평균율에서 급격히 고조된 카오스의 영역에 속한다. 예로 든 시는 시인이 독방에 갇혔을 때 쓰여진 작품인데, 유독 시선에 잡히는 단어가 ‘뜬눈’이다. 게다가 그 ‘뜬눈’엔 ‘핏발’마저 서 있다. 그 ‘핏발’은 세상과 마주하는 시인의 몸과 정신을 포괄해 섬뜩한 날을 벼리고 있다. 그 날 벼림은 인간의 마음 속에 금속성의 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블랙 새버스가 음악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불신과 암흑의 첨예한 사각지대다.
그런데, 이런 겹침이 비단 예로 든 시에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김지하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처연한 음색과 비장한 결기는 분기탱천한 젊음의 음조로 거칠게 소용돌이친다. 소위 민족문학의 첨병으로 기록된 김지하지만, 임의로 가두리 지어진 음악적 양식의 경계를 초월해 따져보면 그의 젊음 또한 헤비메탈이 표현했던 강렬한 분노와 죽음에의 복합적인 미망이 서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30년 전의 시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30년 연하의 내가 근본부터 판이한 30년 전의 음악을 얹어 멋대로 읽어 내리는 이것이 설사 망발이라 해도 감각적으로 동일한 궤에서 작용하는 시와 음악의 생경한 공명통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런 만큼 이러한 반(半)작위적 내통의 근저에는 새로운 생성에 대한 가슴 설렌 욕구가 숨어있다. 오지 오스본의 처절한 음색이 가뭇없는 어둠 속에서 야생의 울림으로 절규하는 김지하의 배면으로 여겨지는 이 순간, 내가 꿈꾸는 건 모든 언어와 음악들이 범우주적인 통합을 이뤄내는 장엄한 울림이다. 그 불가능한 꿈을 자극한 게 다름아닌 김지하의 율려이다.
판소리와 민요가락을 통해 민족정신의 원형을 갈구하던 영혼의 소리꾼이자 여전히 민족정신의 발원지점을 향해 삼라만상을 들추는 노안의 견자에게서 나는 첨단의 음악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음악은 이미 존재해왔던 여러 음악적 양식들이 통합되고 변형되어 거대한 침묵처럼 울리는, ‘상상의 음악’이다. 그 상상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들이 결하고 있는 요소들의 전체적인 통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음악에 드리워진 행간 속에서 새로운 소리들이 솟는 형태인데, 그것은 필연적인 혼란과 이중성을 낳는다. 선과 악, 삶과 죽음 등 대립되는 개념들이 혼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혼란의 최종지점은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결합된 카오스모스이다. 생명의 반대가 죽음이 아니듯,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애초부터 나뉘어 진 것이 아니다. 동시에 생명의 반대가 죽임이듯,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분리는 서구의 이원론이 단절시켜놓은 카오스모스의 은폐에 다름아니다.
김지하의 평생을 지배했던 ‘흰 그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게 이것이고 김지하가 들뢰즈, 가타리와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김지하는 이런 대통합의 사상적 근원을 동학에서 찾는다. 그러나 한 세대가 늦된 나는 언감생심 동학은 고사하고 기독교에 대한 반골의식으로 패기충천했던 서양의 록밴드에게서 카오스모스의 아주 작은 단초를 발견한다. 그럼으로써 노(老)시인의 거대한 사상에 불경한 얼룩 한 점 찍고 사춘기를 지배했던 어둠의 제사장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증폭된 전자음이 가로지르는 깊고 어두운 대기 속에 뿌려지는 흰 그늘의 이미지. 30년 전에 탄생한 음악은 여전히 같은 음계에서 맴돌고 30년 전에 쓰여진 시는 최초 발화자의 육체가 시드는 것과 별개로 저 혼자, 아직도 맹렬하게 울부짖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 현존하는 그것들에 사무쳐 서로의 결합을 꿈꾸는 이 저돌적인 희망을 망상이라 한들 어떠리. 시인 nietz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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