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흔적을 찾아 대륙을 누비던 이윤기씨가 느닷없이 나무를 심고 눌러앉은 까닭을 뒤늦게 알게 됐다.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화가 땅 밑 암반을 굽이치는 무한한 수맥이라면 셰익스피어는 근대문학의 거대한 호수요, 현대문학의 수원지다. 그러니 그가 ‘엘로드(수맥탐사봉)’를 놓고, 그 17세기의 호수에 두레박을 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셰익스피어는 소포클레스를 위시한 그리스 비극작가의 순수혈통을 이어받은 거장이지요. 그가 있어 호메로스 이후 영문학의 장구한 흐름이 근대 이후에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가 이 방대한 작업을 오래 전부터 별러왔던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셰익스피어가 왜 거장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것은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입니다. 셰익스피어 문장과 문맥 속에 암호처럼 숨겨져 있는 신화의 코드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 진가를 느낄 수 없어요."
해서, 그의 이번 번역은 셰익스피어에 내장된 신화의 암호문을 해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첫 작품으로 선택한 로망 희곡 ‘겨울이야기’는, 아내 헤르미오네와 친구인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의 불륜을 의심하게 된 시칠리아 왕 레온티스가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만 끝내 진실을 깨닫고 사랑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여주인공 헤르미오네에게서 그리스 신화 속 헬레네의 딸 헤르미오네를 연상하고, 죽은 것으로 여겼던 왕비와의 16년 만의 재회에서 피그말리온 신화를 대비시킨다. 그는 그 같은 텍스트의 이면과 맥락을, 원전이 다치지않는 한도에서 본문 속에 녹여 넣고 작품 머리말과 맺음말로 해설하고 있다. 질투의 노예가 된 남편의 독백 가운데 기존 번역본이 "아, 이러다가 잠자리를 빼앗겨 뿔난 남편 꼴이 되는 건 싫다"는 대목을 그는 "바람난 아내의 서방 이마에는 뿔이 돋는다는데, 내 이마에도…"로 바꿔놓고 있다. 우리 언어와 셰익스피어 문학이 절묘하게 교접한 사례다.
셰익스피어 전집은 소네트를 제외하더라도 무려 37편에 이른다. 그는 이 방대한 ‘압축파일 풀기’를 번역가인 딸 이다희(26)씨와 함께 한다. 깊이의 관록과 젊은 감성의 조화인 셈인데, ‘겨울 이야기’를 첫 작품으로 선택한 까닭도 젊은 층에게 행복한 독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6월께 ‘한여름 밤의 꿈’이 나오고, ‘로미오와 줄리엣‘ ‘비너스와 아도니스’ ‘햄릿’ ‘리어왕’등이 줄줄이 나올 예정이다. 출판사(달궁)측은 삽화를 가미해 올 컬러 양장본으로 책을 만들 참이다. 여러모로 편하고 친절한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있게 될 모양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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