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KBS 별관 3층 드라마 연습실에 ‘부모님전상서’(연출 정을영)의 제작진과 연기자들이 대본 연습을 위해 모였다. 요즘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기는 드라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매일 편지를 쓰는 안 교감(송재호)과 예순을 코 앞에 두고도 소녀처럼 유행가 가사에 훌쩍이는 아내 옥화(김해숙). 안 교감 댁 맏딸로 자폐아인 아들 준(유승호)을 키우는 성실(김희애), 사이다처럼 톡 쏘는 성격의 맏며느리 아리(송선미)….
목요일마다 열리는 이 모임의 중심에 작가 김수현씨가 있다. "김해숙씨 대사가 처지잖어." "아리 대사, ‘짠짠’이지 ‘짠자자짠’이 아닌데, 다시." 연기자들의 대사에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요즘은 기운이 없어 따따따 쏘아붙일 일도 귀찮아서 그냥 넘어간다"고 하는 게 이렇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살벌하진 않다. "나 몸 좋은 할리우드 남자 배우를 그냥 ‘디카프리오’라고 썼는데 요즘 얘 배 나온다며? 누구로 바꿀까?" 노장파는 ‘브래드 피트’를, 소장파는 ‘주드 로’ ‘콜린 파렐’을 들며 웃어댄다. "대본 연습에 안 나온 적이요? 글쎄요. 다 합쳐봐야 평생에 다섯 번도 안 될 것 같은데."
그에게는 드라마 촬영 직전 겨우 탈고해 팩스로 보내는 ‘쪽대본’이란 단어가 아예 없다. "월·화·수 그리고 목요일 반나절 쓰고 나머지는 대본연습 참가하고 금요일은 외출하거나 운동해요.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은 집에서 쉬면서 책도 보고 그러죠. 요즘은 ‘홍위병’ 다 읽고 ‘펄벅평전’을 보고 있어요. 근데 나 사실은 대개 월요일은 안 써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꾀쟁이 할매’라고 부른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도 없고, 며느리에게 ‘오백년 왕재수’라고 쏘아붙이는 재벌회장도 없는 ‘부모님전상서’를 보고 사람들은 이 ‘꾀쟁이 할매’의 전매특허인 ‘독기’가 누그러진 모양이라고 추측한다. "‘아, 저 할매가 이제 기운이 빠졌나’고 여길 수도 있겠죠. 근데 작품마다 템포나 호흡, 색깔이 다 틀린 거지 나 자체가 달라진 거 아니에요."
그러나 김수현식 ‘드라마 작법’이 조금 달라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부모님전상서’가 무슨 스토리가 있나요? 그래도 즐거워하면서 보잖아요. 이런 드라마도 가능하다 그런 거 보여줬으니까 됐죠." 그의 말대로 드라마는 안 교감 부부와 4남매의 소소한 일상과 행복,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불행을 태연하게 그린다. "너무 아우성치는 세상에 선하고, 안 꼬이고, 배려 많이 하고, 서로 아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하니까 봐주는 것 같아요. 그거 아니면 사람들이 선택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보수적 가부장제를 옹호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난 이제까지 늘 보수를 깨는 작품을 써왔어요. 그렇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절대 깨지면 안 돼요.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엄마는 엄마 역할을, 자식은 자식 도리를 다 하면 되는 거에요." 한 발 더 나가 ‘진보’에 대한 시각도 꺼내놓는다. "결혼은 하면서 시집의 ‘시’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고, 남자만 쏙 빼서 같이 살려고 하는 거, 그게 진보에요? 난 그거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전형적인 김수현식 직설 화법이다. 덕택에 숱한 구설에다 ‘안티’ 세력도 만만치 않다. "글쎄, 내가 성질이 나쁘고 매사를 제 맘대로 좌지우지 하는 걸로 알려졌고, 또 드라마마다 항상 성적표가 고만고만해서 그러겠죠." 그는 자신을 보는 세간의 시선이 ‘찬양’ 일변도가 아님을 선선히 인정했다. "내 존재 자체가 싫은 사람도 있나 봐요. ‘너무 오만해, 잘난 척 해’ 그런 거로 싫어하는 건 재미 없죠."
1968년 데뷔 이래 37년간 한국 방송가의 대표적 문화권력으로 군림해온 김수현. 여전히 현업 드라마작가로 남아있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오래 일을 했고, 쓸만한 거 다 썼고, 쓰기 싫고 지겨울 때도 있는데 왜 또 쓸까 스스로 물어봐요. 근데 여전히 내가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고, 내 자신도 ‘뭐 아직은 할 수 있다’ 이러니까 계속하는 거 같아요."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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