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에 눌려 위신을 펴지 못하던 봄이 드디어 우리 곁에 나타났다. 진정한 봄이 온 것이다. 갈 곳 잃고 방황하던 꽃들이 이제야 자리를 잡고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질서가 무너진 지 오래다. 차례대로 피고 져야 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앞다퉈 판을 벌인다. 그래서 지금 남도는 더욱 바쁘고, 더없이 화려하다.
싱그러움을 한껏 머금은 남도의 봄 중심에 청보리가 있다. 보리고개 세대에게는 넘실대는 청보리의 모습이 결코 추억일 수만은 없을 터. 하지만 청보리는 꽤나 괜찮은 여행코스로 자리잡고 있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은 배고픈 시절 아픈 기억을 아련한 향수로 바꿔놓은 현장이다.
학원농장의 첫인상은 극도의 단순함이다. 17만평규모의 농장에는 오로지 초록만 존재한다. 야트막한 구릉지대를 따라 지평선과 만나는 선 아래로는 모두 녹색보리 일색이다. 눈이 시리다. 언제 우리가 이토록 넓은 초록천지를 보았는가.
보리밭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입안에서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후략)" 학창 시절 즐겨 불렀지만, 이제는 작사, 작곡가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추억의 가곡을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불러내는 데 스스로 놀란다. 문득 노래를 멈추고 옆을 돌아다 보면 곳곳에서 콧노래가 들려온다. 잠시 어색한 눈웃음이 스치기도 하지만 정겹기 그지없다.
초록보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보리 한잎 따다 입에 물면 피리로 변한다. 진초록물결이 바람에 넘실대기라도 할 량이면 온 몸이 초록으로 물드는 느낌이다.
아직은 완전한 보리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거대한 잔디밭을 연상케 한다. 꽃샘추위로 예년에 비해 싹이 적게 올라온 탓이다. 대신 좀더 오랫동안 초록을 볼 수 있다. 6월 수확때까지 목가적인 풍경이 지속된다. 늦은 수확의 대가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내주 쯤이면 갈라진 잎새로 보리싹이 솟아나고 학원농장의 푸르름은 절정에 달한다.
학원농장이 초록바다로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귀농인의 파란만장한 시골정착기로 귀결된다. 농장주 진영호(58)씨는 고(故)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장남이자 대기업 이사를 지낸 잘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그가 회사생활을 접고 이 곳에 내려온 것은 1992년.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 땅콩, 수박, 고추 등 다양한 종자를 심었지만 제대로 수확하기가 쉽지 않았다. 초보농군인 그가 꾀를 내 심기 시작한 것이 보리였다. 보리는 한번 뿌리고 나면 수확때까지 별 다른 손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을 덜 들이는 대신 큰 돈도 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만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리 소비량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보리농사를 포기해야 할 심각한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반 농사꾼이 다 된 진씨에게 전환기가 찾아왔다. 6~7년 전쯤이었다. 넓은 들판에 피어나는 청보리를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몇십년전만 해도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던 풍광이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펼쳐지는 보리밭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본 관광객들의 발길도 늘어났다. 잊고 지냈던 청보리의 흔적을 찾기 위한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평범한 밭때기가 관광지로 변모한 것이다.
농장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민들도 보리농사에 가세했다. 청보리밭의 규모는 이제 30만평으로 확대됐다. 지난 해부터는 주민들과 함께 처음으로 축제를 열었다. 농민들이 준비하는 축제인지라 조촐하게 치렀다. 허기진 관광객에게 보리밥을 내놓았고, 자고 가려는 숙박객에는 방 한 칸을 내주었다. 소박한 축제였지만 학원농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축제가 진행된 한달 동안 쓴 돈이 3억원을 넘었다. 지난 해 보리수확으로 번 돈이 1억2,000만원 가량이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농업과 관광을 접목, 성공한 유례없는 현상에 세상이 놀랐다. 정부는 이 일대를 국내 최초로 경관농업지구로 지정했다. 해마다 보리농사를 짓는 규모를 줄이고 있지만 이 곳에서 재배하는 보리만은 정부에서 책임지고 수매하게 된다.
진씨는 올해 축제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새끼꼬기, 연날리기, 보리개떡만들기 등 체험행사를 대폭 추가했다. 보리, 메밀, 녹두 등 민속음식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된다. 9일부터 내달 8일까지 한달간 진행된다. (063)562-9895.
고창=글·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활짝 핀 고창의 봄 | 가볼만한 명소 "왜구를 막아라" 읍성엔 호국의 비장함 아직도…
어렵게 나선 걸음. 보리밭만 보고 돌아가기에는 봄 햇살이 너무도 따습다. 고창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제 막 시작된 고창의 봄을 느낄 수 있는 빼놓지 말아야 할 명소들이 줄을 섰다. 하루에 모든 곳을 본다는 생각은 접자. 주차간산(走車看山)식으로 라도 반드시 둘러봐야 할 관광지를 소개한다.
◆ 선운사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선운산 자락에 있다. 선운산의 원래 이름은 도솔산이었으나 절이 유명해지면서 산 이름까지 바뀌어 버렸다. 국내에 수많은 절이 있지만 선운사만큼 많은 꽃을 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봄이면 벚꽃과 동백, 가을이면 상사화와 단풍으로 뒤덮인다. 진입로에서 시작되는 벚꽃이 내주쯤이면 만개한다.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이지만 선운사에서는 이제야 시작이다. 동백(冬柏)이 아니라 춘백(春柏)인 셈이다. 대웅전 뒤로 수령 500년 안팎의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군락(천연기념물 184호)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 들면 송창식의 ‘선운사’ 한 구절이 절로 나온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선운사에 와서 도솔암을 빼놓고 돌아갈 수도 없다. 절에서 등산로를 따라 3.5km가량 오르면 동양최대규모라는 마애불이 버티고 섰다. 시간이 난다면 인근 낙조대, 선학암, 봉두암, 사자암, 만월대 등 경승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해발 400m가량으로, 높지 않고 경사도 험하지 않아 부담이 되지 않는다. 선운산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63)563-3450
◆ 고창읍성
수원 화성, 서산 해미읍성, 단양 온달산성 등 성곽으로 이름난 곳이 많지만, 고창읍성은 이중에서도 초기 축성때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1453년(단종 원년)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1,684m의 둘레를 따라 아낙네들이 줄을 서서 성밟기하는 답성놀이가 유명하다. 음력 윤달에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돌면 무병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서·북 등 3개의 문에 옹성이 세 군데 있다. 적관측을 위해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낸 치성 6개와 수구문 2개도 있어 완벽한 성곽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안에는 22개의 관아건물과 연못 2개와 샘 등이 있었으나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됐다. 지금 들어서있는 동헌, 객사, 내아 등은 1976년 복원된 것들이다.
성내의 조경이 빼어나 봄기운을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성둘레에 심어진 철쭉 등 봄꽃이 막 피어나기 위해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주변에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생가와 판소리전수관과 동리국악관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 고인돌 유적
고창의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 고인돌이다. 고창에만 80여곳에 2,0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동양최대규모이다. 특히 고창군 아산면 죽림리와 상갑리에만 447기가 들어서 있다. 고창읍성에서 선운사로 가다 보면 야트막한 평지에 거대한 고인돌 군락이 서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커다란 돌덩이의 용도를 모르던 시절, 주민들이 내다 버린 돌만 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무지에서 비롯된 유적훼손이 어찌 이 뿐이랴 싶지만, 안타까운 현실임에 틀림없다. 기원전 10세기 전후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가 큰 것은 300톤에 달한다고 한다. 죽림리, 상갑리, 도산리 일대에 6개의 탐방코스가 마련돼있다. 3코스 옆에 있는 안내소에 문의하면 문화유산해설사의 상세한 설명을 받을 수 있다. 고인돌공원 관리사업소 (063)563-2793
고창=글·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여행수첩
◆ 가는 길 ●고창은 2개의 고속도로가 가까이 있어 교통편이 좋은 편이다.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고창IC에서 빠져 나와 15번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 무장면에서 796번 지방도를 이용, 공음면 학원농장에 닿을 수 있다. 고창읍내에 진입하면 학원농장으로 가는 안내표지판이 곳곳에 붙어 있어 길찾기가 어렵지 않다.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 정읍IC까지 간 뒤 고창방면으로 가는 22번 국도를 따라 고창읍내로 진입해도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창 방면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5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이용, 정읍역까지 간 뒤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고창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 먹거리 ●고창의 일등 먹거리는 풍천장어(사진)와 복분자술이다. 흔히들 풍천을 고유지명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바닷바람이 부는 강 하구를 뜻하는 일반명사이다. 고창의 장어는 대부분 서해 곰소항과 인접한 인천강에서 잡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지역 장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운동량이 많기 때문에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맛이 담백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댐건설 등으로 장어수확이 줄어, 최근에는 양식장어를 이 곳에서 키워내고 있다. 선운사 인근에 장어전문점이 즐비하다. 신덕식당(063-562-1533), 동백가든(563-4141), 산장회관(063-563-3434), 초원가든(564-5037), 장어나라(564-8020). ●복분자는 산딸기의 일종. 어려운 한자로 포장돼있지만 복분자로 담근 술을 먹으면 요강(盆子)을 뒤집을(覆) 정도로 힘이 세진다는 질펀한 해학이 숨어있다. 술을 빚을 때면 부녀자들이 남성금지구역에 모여 정성껏 빚어냈다고 한다. 실제로 남성의 정력강화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분자 한 잔에 풍천장어 한입, 절묘한 궁합이다. 선운산 특산주 흥진(063-561-0209), 고창명산품복분자주(561-2031), 고창고인돌복분자주(562-2008).
◆ 잘 곳 ●선운사를 중심으로 숙박시설이 밀집해있다. 선운사 관광호텔(561-3377)이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도 좋은 편이다. 유스호스텔(561-3333), 동백호텔(562-1560), 선운장여관(561-2035) 등. 학원농장도 5실정도의 민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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