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해마다 고향에 간다. 사월 첫째 일요일(3일), 올해에는 철이 늦어 꽃 구경은 할 수 없었지만 남녘의 산과 들에는 봄 향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두 동생과 작은 아들만 함께 한 고향 길이었다. 여든이 넘으셔도 지난해까지 앞장을 서시던 어머님이 동행을 못하시어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순도순 농사를 지으며 조상 대대로 지켜온 고향이었다. 하나 둘 일가들이 떠나 흩어져 살게 되었고, 옛 정을 살리자며 중시조님 봄 제사를 지낸다.
훼방꾼처럼 빗방울이 흩뿌렸다. 음복을 하려다 말고 산에서 내려와 작은 집에 모였다. 당숙과 당숙모님도 지난해와 달리 건강이 좋아져 밝은 모습이었고, 어리게만 보이던 조카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시집 와서부터 시어른과 시할머님을 모시고 살림하는 가운데 행상을 해서 딸을 교사로 키운 제수씨가 한없이 고맙고 빛나 보였다.
화기애애한 정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개인택시를 하던 동생은 벌이가 안 된다며 택시를 팔아 유통일을 한다 했고, 노점을 하던 여동생은 제법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형님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세 아들 모두 뒤를 돌봐 줘야 할 형편이었는데 결혼한 작은 아들이 사업한다며 빚만 떠안게 된 것이 몇 년 전 일이었다고 한다. 농사일을 형수님에게 맡기고 공사장을 전전하던 형님의 나이 올해 예순넷. 지난해 가을부터 몸이 아파 일을 못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아들이 진 빚을 5,000만 원이나 갚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얼마 전에는 당숙모님 기일이어서 타지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 내외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출근 때문에 그날 밤 돌아가겠다는 동생을 위해 형님은 서둘러 제사를 지냈다며 오랜만에 형제의 정도 나누고 싶었는데 그만한 요령도 없느냐며 서운해 했다.
각박해져만 가는 일상에서 형제·가족들이 고향을 찾아 한 데 모이는 것도 행복이 아닐까? 작별을 서운해 하던 형님의 야윈 모습이 떠오른다. 형님, 건강하십시오.
이대규·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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