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앞엔 등불처럼 세상 앞엔 거울처럼.’ 7일 신문의 날을 앞두고 한국신문협회 한국기자협회 등이 독자 공모를 통해 선정한 표어다. 뉴미디어의 범람 속에 신문이 최대 위기를 맞고있는 상황에서 신문 본연의 역할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고자 하는 뜻이다.
요즈음 언론시장에서 독자 또는 시청자의 위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1인 미디어’로 불리는 블로그의 등장 등 매체 환경의 급변이 주요인으로 꼽히지만, 언론의 잘잘못을 가려 비판하고 때로는 격려하는 언론 수용자 운동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학계에서는 통상적으로 국내 언론 수용자 운동의 기원을 1960년대 언론윤리위원회 파동으로 잡는다. 그러나 사실은 일찍이 한말 개화기에도 언론 수용자 운동이 있었다는 학설이 제기돼 관심을 끈다. 최근 ‘한국 언론 수용자 운동사’(한나래 발행)를 펴낸 부산대 채백(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때도 그랬었나’ 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언론 수용자 운동 역사에도 이런 ‘유쾌한 배반’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채 교수는 이런 첫 사례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박문국(博文局)이 1884년 갑신정변 와중에 군중들에 의해 불타버린 사건을 든다. 이 사건으로 한성순보는 창간 14개월 만에 폐간됐다. 박문국이 공격 대상이 된 데는 ‘한성순보’의 창간과 발행 과정에 일본이 깊숙이 개입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작용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을 국내 최초의 수용자 운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독자들이 신문 살리기 운동에 적극 나선 사례도 있었다. 소위 식자층을 대상으로 발행된 황성신문은 극심한 경영난에 봉착하자, 1903년 2월5일자 사고를 통해 재정 현황을 공개하고 구독료 납부를 호소하면서 "신문의 속간이 어렵게 됐으니 이는 전국이 장님, 귀머거리가 되는 것으로서 이를 분히 여기며 무딘 펜을 던진다"는 비장한 논설을 실었다.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워서 4월까지 총 65통의 격려편지가 날아들었고, 황성신문의 초기 자본금과 맞먹는 2,032원20전의 성금이 모였다.
중류 이하 대중과 부녀자가 주 독자층인 ‘제국신문’도 1907년 9월 지면을 통해 경영난을 호소한 뒤 재미동포까지 합세한 성금 모금에 힘입어 정간 10여일 만에 속간할 수 있었다. 채 교수는 이를 "당시 독자들이 신문의 중요성에 대해 상당히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분석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상대로 한 불매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22년 운양 김윤식의 장례격식 논란이 발단이 된 동아일보 불매운동 등 상당수가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됐지만, 저자는 1930년대 이후 활성화한 잡지의 신문비평 활동과 더불어 독자의 적극적인 권리의식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채 교수는 책 말미에 90년대 이후 시민단체 중심의 언론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러나 이 운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며 "거창한 구호보다는 작더라도 현실적 목표로 성과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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