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을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 가운데 하루로 기억한다. 우리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통일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는 기대가 교차한 시간이었다.
불행히도 남북 관계는 그 후 눈에 띄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기대했던 남북 정상회담(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다시 열리지도 않았다. 남북 관계에 관한 한 다소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다. 오히려 남북 관계의 개선과 남북 통일은 잃어버린 화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국가보안법 철폐가 지지부진한 것이 그 본보기다. 행정수도, 행정도시의 의미는 무엇일까? 통일은 아예 안 오거나 오더라도 아주 먼 훗날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날의 희망과 감격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북미 관계의 악화가 그 이유다. 북한에 대해서 극히 적대적인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부시 행정부가 자리잡은 이후 남북 관계 개선 또는 통일에 접근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어려웠던 것 같고, 사회적 분위기 역시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에게 체질화한 미국 눈치보기, 미국 비위 맞추기가 통일 정책과 그 의식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사회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수 우익세력이 통일보다도 친미를 우선시하여 미국이 허용하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 통일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친북’행위로 몰아 부치는 것도 통일로 가는 길에 놓여 있는 장애물이다.
내가 보는 우리의 모습은 미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여 우리보고 통일 논의를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꼴이다. 글쎄 그럴 날이 있을까?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란 어렵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전망이다. 과거에 영국과 같은 식민 세력이 즐겨 사용하던 나누어서 통치한다는 원칙이 미국의 한반도 지배에도 들어맞는다.
한국이 쪼개져 있음으로 인해서 미국은 군대주둔의 명분을 얻고, 프랑스의 판매조건보다 불리해도 자국의 전투기를 팔 수 있으며, 남한의 대미 의존도를 계속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미국이 왜 앞장서서 통일을 도와주겠는가? 미국이 한반도를 쪼개 놓았다고 해서 이 나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하는데 앞장서 줄 것이라고 믿는[결자해지·結者解之] 순진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이 보이면 강력한 경고음을 보내는 것이 미국이 아닌가. 한국의 2004년 국방백서에서 평양이 주적이라는 부분을 삭제한 것과 관련해서 한국은 누가 적인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화당 소속의 미국 하원 국제위원장의 발언에서도 남한과 북한이 계속해서 적대적인 관계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미국의 성향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외국(미국)의 힘으로 쉽사리 이루어졌지만 통일이 그런 방식으로 올 것으로 전망되지는 않는다.
남북한 스스로 각 분야의 교류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서로 신뢰를 쌓아가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낮은 수준의 통일부터 이루어가는 것만이 통일로 가는 길이며 민족의 번영과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꾸어 가는 길이다. 원칙은 이미 남북 정상회담 때 마련되었다. 남북의 정상은 조건 없이 만나야 한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야 한다. 만남 속에 길이 있다. 통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이동인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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