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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9) 월드 퓨전 그룹‘쌍깃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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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9) 월드 퓨전 그룹‘쌍깃프렌즈’

입력
2005.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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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은 물렁물렁하고 둥글고 차가운 동시에 뜨겁다. 개인마다 천차만별한 느낌과 감별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건 그 모든 개별적인 느낌들의 총체에 대해서이다. ‘손에 쥔다’라고 했지만, 그것이 단지 촉각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촉각은 시집을 대하고 있는 모든 감각들의 최전선에 불과하다. 감각이란 육체의 모든 결들을 포괄하는 정신의 땀구멍과도 같다. 좋은 시집은 그 미미한 숨결의 통로를 따라 물처럼 스미는 음악의 흐름과도 흡사하다. 그 순간 책을 보는, 그리고 책을 쥐고 있는 손에는 아무런 무게도 질감도 없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모든 건 영원의 귀퉁이에서 자연발아했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바람의 맨살일 뿐이다.

시집 얘기를 먼저 꺼냈지만, 정작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건 어떤 음악에 관해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삶의 지층 속에 감춰진 무수한 영적 고뇌에 관한 것들이다. 때문에 이야기는 음악을 모티프로 시작되어 시를 거쳐, 육체와 자연을 얘기하다가 다시 음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음악 보다 근원에 맞닿은 침묵 속에서 그 모든 변설들을 스스로 지우며 입을 다물어 버릴지도 모른다. 우선, 한 편의 시로부터 출발해 보자.

소리 뭉치의 프리즘은 색이 없는 햇빛을 일곱 가지 빛깔의 물 연기로 환원한다. 색이 없는 물은 투명한 껍질을 포개고 또 포개어 거울의 깊이를 만들고 말이 없다.

-허만하, ‘물의 성상’ 에서

앞서 어떤 음악이라고 말한 건 쌍깃프렌즈(Sangeet Friends)라는 음악집단의 ‘아유타에서 불어온 바람’을 일컫는다. 쌍깃프렌즈는 한국과 인도의 연주자들이 각자의 민속적 요소를 최대한 살린 즉흥 앙상블을 기본으로 하는 월드 퓨전 그룹이다. 인도의 민속음악인 라가(Raga)를 바탕으로 한 악기편성에 가야금과 아쟁 등이 가세하는데, 흔히 명상음악이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스크리트어 ‘라가’는 색채, 정열, 욕망, 환희, 애정, 성교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라가는 이러한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선율형을 가진 선법에서 비롯된 음악으로 우주에너지의 변화를 의미하는 ‘나다’를 근본으로 한다. 따라서 연주 형태는 연주자의 정서적 반응 여부에 따라 무한대의 변형 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모티프를 따르더라도 연주의 패턴이나 양식은 연주 때마다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기본 음계와 코드에 따라 변형되는 재즈의 즉흥연주와도 차이가 있다. 라가는 매순간 다시 태어나고 사라지는 음악인 셈이다.

쌍깃프렌즈의 ‘아유타에서 불어온 바람’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제작된 음반이다. 아유타는 허황후의 고향인 고대 인도의 왕국을 가리킨다. 하늘의 계시에 따라 붉은 돛배를 타고 한반도 남단에 도착한 허황후가 금관가야의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반도 고대사의 가장 아름다운 설화 중 하나다. 한반도에 불법(佛法)이 전해진 것도 그때였다. 쌍깃프렌즈는 이 이천 년 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고도의 즉흥연주를 전개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연주가, 비록 레코딩되긴 했지만, 두 번 다시 똑 같은 방식으로 연주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레코딩된 음반을 반복해서 들어도 매번 들을 때마다 다른 느낌, 다른 정조가 생겨난다. 이건 허만하 시인이 ‘색이 없는 물은 투명한 껍질을 포개고 또 포개어 거울의 깊이를 만들고 말이 없다’고 응시한 물의 성상과 일치하는 감흥이다. 스스로 ‘거울의 깊이를 만들’며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물의 운동. 책이 물렁물렁하고 둥글게 느껴지는 것처럼 쌍깃프렌즈의 연주는 매끄럽고 현란한 소리의 계곡들을 오르내리다가 불현듯 길게 늘어지는 침묵 속에서 텅 비어있는 거울을 만나게 한다. 그 거울은 아집과 욕망으로 불콰하게 달아오른 자아의 표상이 아닌, 텅 빈 채로 모든 얼굴들을 그려내는 우주의 아름다운 ‘틈’이다.

다시, 허만하 시인의 시를 인용해 본다.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 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탓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허만하, ‘틈’에서

모든 소리와 색깔들의 진원지이자 무덤인 그 틈을 발견할 때 삶의 국면이 달라진다. 존재하는 것들의 그림자 속에 존재의 근원이 있고, 갈라지고 찢긴 시간의 어슴푸레한 틈 속에 현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건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파고들었던 케케묵은 주제인 동시에,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그 실체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신의 영원한 첨단지대이다. 그 지점은 감각이 최대한 열렸을 때, 그리하여 모든 감각이 단 하나의 집중점을 향해 완벽하게 소멸했을 때 발견된다. 쌍깃프렌즈의 연주를 들으면서 허만하의 시가 강렬하게 포획됐던 건 열띤 흥분과 차분한 관조가 일치하는 그 지점을 잠깐이나마 ‘주물러’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시가 유효한 건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음악이 제공해주는 열락이 육체를 직접적으로 자극한다면 언어는 그 열락의 그림자만을 환기시켜 줄 뿐이다. 그러면서 더 많은 음악을 여백 속에 띄워놓게 되는데, 그 순간 마음은 알 수 없는 조갈에 시달리며 스스로 넘쳐흐른다. 한 편의 시가 심금을 울릴 경우, 그 여백 속에 투영되는 건 다름아닌 읽는 사람의 정서적 울림이다. 시를 읽는 건 그 속에 숨은 자신의 물 밑을 헤아리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시에 제대로 반응하는 인간의 감각은 에로스적인 과밀상태와 다를 바 없다. 거기엔 쓰여지지도 연주되지도 않은 초유의 음악이 바글바글 끓고 있다. 쌍깃프렌즈는 그 과포화된 감각의 첨단을 유현하게 비행하며 유유히 사라진다. 한 편의 연주가 끝났을 때 유독 길게 느껴지는 틈 사이의 침묵, 그 명징한 절명의 순간 ‘거울의 깊이’가 더더욱 깊어지며 자기 자신의 얼굴이 허공에 떠오른다.

쌍깃프렌즈는 현재 ‘아유타에서 불어온 바람’에 이어 ‘신성한 도시의 강’, ‘금강경’ 등 총 세 장의 연주음반을 발매했다. 월간 ‘객석’ 기자 출신인 음악평론가 김진묵씨가 수 차례 인도를 오가며 만난 뮤지션들과 가야금 명인 백인영 등 한국의 연주자들을 규합해 이루어진 이들의 앙상블은 김진묵씨가 제시하는 모티프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녹음도 한번에 끝낼 만큼 계산된 요소가 극히 미미하다. 김진묵씨는 음악팬 사이에선 재즈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중진 평론가이다. 그는 어느 순간, 모든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라가에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연유야 어떻든, 쌍깃프렌즈의 연주를 듣는 건 내겐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다.

‘아유타에서 불어온 바람’은 실재했던 특정한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받아들이는 게 더 좋을 듯하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사랑을 나누면 효과가 배가될 거라는 식의 약장수 같은 말을 굳이 하게 되는데, 놀라웠던 건 쌍깃프렌즈를 들으며 읽은 허만하의 시집이 돌에 새겨진 음각문자처럼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는 사실이다. 수 십년 동안 파편적으로 쓰여졌을 시인의 시가 현재 내가 듣고 있는 음악에 대한 언어적 도해로 읽히는 이런 감각적 희열은 논리적 이성으로 따지려 들면 하나도 해명 될 게 없는 삶의 신비에 가깝다. 그런 신비가 발원하는 지점이 바로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이다.

그 틈이 일회적인 만큼 삶의 모든 극적인 체험은 노도처럼 밀려들다가 공중에 뜬 물방울처럼 사라져버린다. 그 체험의 절정에 정작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무아지경’이라 일컫는 그 지점을 통과해 나온 후에 비로소 만져지는 시간은 자아가 있었다는 흔적만으로 파동치는 텅 빈 바람의 몸짓에 불과하다. 쌍깃프렌즈는 이 텅 빈 바람의 속살을 인도 악기와 한국 악기의 기기묘묘한 앙상블로 발라낸다. 거기에 색깔을 입히고 질감을 부여하며 육체와 정신의 밀도를 진작하는 건 듣는 이의 몫이다. 그게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라는 건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들고 있는 게 허만하의 시집이 아니라 김지하의 시집이어도 좋고 또 다른 어떤 소설이나 신문이라도 좋다. 관건은 음악이 흔들어대는 마음의 결을 따라 한 순간 또렷해진 세상의 풍경 속에서 자기자신의 깊은 거울을 마주하는 일이다. 물렁물렁하고 둥글고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어떤 것들이 당신에게도 분명히,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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