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지주를 잃었지만 저는 행운아입니다. 교황께서 전해주신 사랑의 온기가 제 손엔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4일 오후 1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뒤 차려진 서울 중구 명동성당의 빈소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조문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수만명이 찾은 빈소 앞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조문객들에게 연신 검은 색 리본을 달아 주고 교황사진을 나눠 주면서 조문 예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곁들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교황의 빈소를 지키는 성당 산하 단체 ‘레지오마리에’ 회장 박종하(54)씨는 21년 전 교황이 방한했을 때 이곳 명동성당에서 교황과 악수한 몇 안 되는 신도 중 1명. 그때의 기억으로 박씨는 교황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성당으로 달려와 빈소 앞에서 조문을 돕는 일을 자원했다.
"가톨릭신자로서 교황의 손을 직접 잡아 봤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은총입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미 그때 저는 하느님의 신자로 거듭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또 실제 그 이후부터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하게 됐습니다. 지금 빈소를 지키는 일이 그때 제가 받았던 은혜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겠지요."
교황이 1984년 5월6일 명동성당 대성당을 방문할 당시 박씨는 ‘레지오마리에’회장을 맡고 있었다. 신도들의 헌 옷가지를 모아 수선한 뒤 어려운 이웃이나 수해지구에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다. 박씨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에 헌신했다. 성당 측에서도 이런 박씨의 노고를 인정해 교황방문 시 맨 앞줄에서 악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배치했다.
그런데 대성당 안에서 바짝 긴장한 마음으로 교황을 기다리던 순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교황이 성당으로 오던 길에 괴한이 나타나 총으로 교황을 겨누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 비록 장난감 총으로 밝혀져 교황은 다시 성당을 향해 출발했지만 이 때 성당에서는 "혹시 교황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잠시 후 교황은 성당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박씨를 비롯한 일부 신도들과 손을 맞잡았다.
당시 교황과 악수를 했던 신도 중 현재 명동성당에 남은 신도는 박씨를 포함해 10여명. 그들은 모두 박씨처럼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박씨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라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처럼 저도 행복하기 위해 부족하지만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