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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의 정치읽기/ 고이즈미는 콜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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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의 정치읽기/ 고이즈미는 콜에게 배워라

입력
2005.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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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7일 러시아 신문에는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콜 전 총리가 심장병 대수술을 앞두고 있는 옐친 전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모스크바 북서쪽 자비도보 별장을 방문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안이나 무거운 주제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맞잡은 덩치 큰 두 정상의 사진, "건강해지면 내년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낚시도 하면서 휴가를 보내자"고 말하는 콜 전 총리의 말이 따뜻하게 소개돼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던 한 외교관은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기사를 보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은 훈훈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당시 독일은 통일 이후 새 질서를 구축하는데 러시아의 협조와 양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면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달려온 콜 전 총리를 러시아인들은 싫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9년이 지난 지금 콜 전 총리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오버랩 시켜본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고 평화헌법을 개정, 군대를 갖는 보통국가로 일대 변신을 하려는 시점에 고이즈미 총리는 콜 전 총리와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한국과의 우의를 다지기는커녕 오히려 염장을 지르면서 큰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우리하고만 그런 게 아니라 중국과도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방자하기까지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배상 문제를 언급한 것을 ‘국내용’이라고 폄하하고 외무성장관, 문부성장관이 한국과 노 대통령을 은근히 비난하는데도 못 본 체하고 부추기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무슨 묘수가 있는 것일까. 세계 유일 강대국인 미국과 ‘형님,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일까. 100년 전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을 침범했던 제국주의의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 때의 조선이 아니고 중국 역시 그렇다. 우리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고결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뭔가를 도모하려면, 이웃나라의 마음을 사로잡는 콜 전 총리의 지혜 정도는 배웠으면 한다. 역설적으로 일본이 지금처럼 왜소하게 행동하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의 과오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미 존경받는 국가가 돼있을 것이고 우리는 감히 그들을 ‘왜국(倭國)’이라고 조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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