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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장동휘씨 별세/‘돌아오지 않는 해병’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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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장동휘씨 별세/‘돌아오지 않는 해병’ 잠들다

입력
2005.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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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선 굵은 액션연기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원로 영화배우 장동휘씨가 2일 오후 9시3분 충북 청주 참사랑병원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고인은 4년 전 고관절 골절로 뼈 제거 수술을 받은 후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해 왔다. 큰아들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환씨는 "아버님이 최근 합병증 증세가 급격히 악화해 한달간 치료를 받으시다가 뇌졸증을 일으키셨다"고 전했다.

고인은 1919년 인천에서 태어나 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악극단 칠성좌에 가입, ‘아리랑’의 악역 오기호로 무대에 오르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이후 악극단 낙천지에서 활동하던 그는 57년 3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에서 영진 역을 맡아 영화에 데뷔했다.

고인은 깊숙이 내려쓴 중절모 밑으로 지긋이 노려보는 매서운 눈이 트레이드 마크로 전쟁·범죄 영화에서 의리의 사나이나 주먹 세계의 보스를 주로 연기했다.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액션과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팬들을 사로잡아 한때 18편의 영화에 겹치기로 출연할 정도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66년에는 파월 군인들의 활약상을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한 ‘맹호작전’을 제작해 화제를 뿌렸으나 흥행참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1982)을 끝으로 12년간 스크린을 떠났다가 94년 엄종선 감독의 ‘만무방’에 윤정희씨와 함께 출연, 전쟁에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노인역을 열연했다. 고인은 이 영화로 94년 제5회 춘사영화예술상 남우주연상과 95년 40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거머쥐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생전 500여편 영화에 출연한 고인의 대표작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검은 머리’(1964) ‘대전장’(1971) ‘증언’(1973) ‘성난 능금’(1976) ‘뒤 돌아 보지마라’(1979) 등이나, 정작 고인은 데뷔작인 문예영화 ‘아리랑’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먼저 타계한 황해, 허장강씨와 충무로 ‘3악당’으로 불릴 정도로 악역을 도맡았지만, 성격도 여려 "인정 많고 눈물이 많아 자신의 형편을 보살피지 않는 배우"로 충무로에는 알려져 있다. 조희문 상명대 영화과 교수는 "고인은 한국 정통 액션의 주류"라며 "우리 정서에 걸맞은 가부장적이면서 자기 희생적인 이미지지와 선 굵은 연기로 국내 영화의 1차 황금기를 이끈 대배우"라고 평가했다.

고인은 영화배우협회장과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을 거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장도 역임했다. 유족은 아내 조원희씨를 비롯해 기타연주가인 재환, 호선, 봉옥씨가 있다. 3일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에는 한진희, 이덕화, 변장호 등 영화계인사들이 줄을 이어 조문했다. 발인은 5일 오전10시이며,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02)3410-6915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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