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교회 지배시대를 빼면 요한 바오로 2세 만큼 당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황은 없다."
BBC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에 바친 헌사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수장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100여개 나라를 발로 누비며 해묵은 증오를 푸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종교 뿐 아니라, 이념과 민족의 갈등을 치유하려 한 평화와 화해의 사도였다.
그는 외교 무대에서도 주역으로 활동한 ‘세계의 목자’(Universal Pastor)였다. 특히 강대국의 전횡과 전체주의의 압제에는 쉬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18세기 이후 러시아와 독일, 양대 강국에 의해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졌고 20세기엔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사상에 억압 받은 폴란드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이런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냉전 해체 이후에는 유일 패권국인 미국의 경제침략(신자유주의)과 군사침략(이라크전)에 극도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저명한 바티칸 사가인 마르코 폴리티는 "요한 바오로2세는 위대한 교황이자 20세기의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기렸다.
◆ 신이 선택한 젊은이 = 젊은 교황은 천부(天賦)의 재능을 가진 르네상스식 만능인이었다. 1920년 폴란드의 바도비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38년 아젤로니아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는 8개 국어에 능통한 ‘학구파’이자 스키와 요트선수로 활약한 ‘스포츠맨’이었다.
멋쟁이 젊은이가 신의 종이 되길 자청한 계기는 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이념과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몸서리치게 보여 준 2차 대전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안드레아 예비엔이란 이름으로 시와 희곡을 쓰며 연극배우 활동을 하다 42년 비밀리에 운영되던 크라코프 신학교를 졸업, 46년 사제가 됐다.이후 공산화된 조국 폴란드를 떠나지 않고 64년 크라코프 대주교, 67년 추기경을 거쳐 78년 교황에 선출될 때까지 공산주의의 핍박에 용감하게 맞섰다.
◆ 사랑과 화합의 순례자 = 그는 재임기간 129개국을 돌며 온 힘을 모아 인류의 화해를 역설했다. ‘신의 운동선수’(God’s Athlete)란 별칭이 생길 정도였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며 맨 먼저 엎드려 땅에 입 맞추던 그의 모습은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됐다.
그는 종교간 증오를 푸는 데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이슬람 땅과 사원에 발을 디딘 첫 교황이었으며, 프로테스탄트 기독교회와 유대교회(시나고그)를 찾은 첫 교황이었다. 79년 터키 이스탄불의 그리스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만남을 계기로 교황이 시작한 동서 교회의 화해는 이제는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99년엔 교황청에서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을 만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땅 인도를 찾았다.
교황의 노력은 94년 ‘3,000년을 맞는 칙서’를 통해 가톨릭교회가 과거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 불의에 대한 침묵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는 자기 고백으로 이어졌다.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종교재판과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거짓을 강요했던 종교재판소의 오류 등을 인정했으며 교황청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대항하지 못했다며 인류 앞에 사죄했다.
증오가 어디 종교 간에만 있을까. 교황은 82년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찾아 종전을 설득했고, 99년 코소보 전쟁 때도 특사를 파견해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와 함께 분쟁 종식을 위한 단식 기도를 했다.
◆ 피압제자의 대변인 = 교황이 증오한 것도 있다. 바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와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탐욕이었다. 그는 항상 낮은 곳을 바라봤다.
그는 공산주의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위 이듬해인 79년 그가 냉전의 칼바람을 헤치고 조국 폴란드를 방문, 공산정권과 투쟁을 벌이던 자유노조를 지지한 일은 동구권 붕괴의 서막을 연 사건으로 기록된다. 바티칸 권위자인 토마스 리스 신부는 "교회가 냉전의 한 가운데서 그를 교황으로 선출했을 때 누구나 그것이 현실 정치적 선택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에 우유부단함이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교황은 93년 폴란드 철학자들과 나눈 대담을 바탕으로 엮은 저서 ‘기억과 정체성’에서 "공산주의는 필요악일 지 모른다"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공산주의가 언제 사라질지는 불확실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악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공산주의가 나치즘보다 오래 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교황은 냉전 이후엔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일방주의적 횡포를 거침 없이 비판했다. 97년엔 리비아와 수교했고, 98년엔 쿠바를 찾아 "미국의 37년 쿠바 경제제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99년 멕시코에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윤과 시장의 법칙만을 고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라크전에 대해서도 "무력 공격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과 긴장만 고조시키는 것"이라며 여러 차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가 유일하게 비판 받는 대목은 피임, 낙태, 안락사, 동성애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선악투쟁’의 관점에서 완고한 전통주의를 고수했다는 점이다. 비판자들은 교황의 보수적 입장으로 교회 분열이 심화하고 교회가 사회 현실과 멀어지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록들/ 26년 5개월 15일 재위 ‘역대3위’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많은 기록을 세웠다. 재위기간으로 볼 때 그는 가톨릭 역사상 3번째이다. 그는 1978년 10월 16일부터 2005년 4월 2일까지 26년 5개월 15일 동안 교황자리에 있었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 19세기 비오 3세 이어 재위기간이 세 번째로 길고, 20세기 이후로는 최장이다. 또 16세기 네델란드인 하드리아누스 2세 이후 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무려 455년 만에, 슬라브 민족·공산권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 교황에 선출됐다.
그가 여행한 거리는 총 124만7,613km로 비공식 최고 기록이다. 국내여행은 146회, 국외여행은 104회로 2,000년에는 교황으로 처음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했다. 1999년에는 11세기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 처음 동방교회(정교권) 국가인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 반목해온 루터파 등과도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그는 또 2003년 테레사 수녀를 비롯해 1,338명을 시복(諡福)하고 482명을 시성(諡聖) 했는데 이는 지난 4세기의 교황이 시복·시성한 숫자를 합한 것 보다 많다. 그가 임명한 추기경도 231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183명이 생존해 있다. 그가 접견한 정치지도자는 국가원수가 776명, 총리가 246명으로 포함, 1,600명 이상의 정치 지도자를 만났다. 그는 유럽식 대신에 베이컨과 달걀로 아침식사를 한 최초의 교황이고, 스키와 등산, 커누 등을 질긴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8개 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을 뿐 아니라, 일본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에다 아프리카 방언 몇 가지도 할 줄 알았다. 그는 60년대 희곡을 발표한 문학도로, 4권의 단행본을 비롯해 모두 500여편의 수필과 논문을 썼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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