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도쿄 북서부 와코시에 있는 이화학연구소를 방문했다. 숙소에서 NHK TV의 종전(終戰) 특집방송을 보게 되었다. 일본 천황이 맥아더 장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것을 두고 항복 대신 종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일본이 전쟁패배에 대한 수치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집 내용은 왜 미국에게 패전하였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이었다. 장례식 분위기와 같은 색조로 비장하게 방송됐다.
야마모토 제독은 미국의 과학기술이 일본보다 월등해 패배할 것을 알았지만 천황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전세는 역전됐다. 당시 미국의 신무기인 유도탄을 개발한 RCA 기술자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진공관이 들어 있는 유도탄으로 일본 항공 모함을 정확하게 공격했다는 것이다. 전쟁 당시 미국은 레이더가 있었고 일본은 없었다. 일본 전투기와 배가 어디 있는지 아는 미국은 해전과 공중전에서 이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 이공계 학생들은 전쟁 중 군대에 가지 않고 교수와 연구원들과 함께 무기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일본도 태평양전쟁 승패의 분수령이 된 미드웨이 해전에 레이더를 투입했다. 자신만만했던 일본은 이 전투에 올인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일본 레이더에 보이던 자국 전투기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미국은 높은 고도에서도 탐지할 수 있는 향상된 레이더를 가지고 나왔으나 일본은 탐지 못하는 레이더를 사용한 것이다. 미국 비행기는 구름 위에서 높이 날아 일본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았다. 미국 레이더에 포착된 일본 전투기를 바로 위에서 급습해 대부분의 일본 전투기가 격추됐다. 전투기 지원 없는 일본 함대는 궤멸해서 오키나와를 끝으로 일본 본섬까지 밀리게 되었다. 일본이 아니면 생각하지 못할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만들면서까지 미국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미군의 인명 손실이 점점 커지자 미국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해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NHK 특집 방송이 일본 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열세한 과학기술 때문에 패배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승리도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이라는 탁월한 무기를 발명했기 때문이지 나라 사랑의 충정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전쟁 전 일본 과학기술은 유럽국가보다 낙후됐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미국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해 얻은 달러로 과학기술을 일으켰다. 현재는 미국 다음으로 연구 개발비를 많이 쓰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이며, 미국 다음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회사가 적자가 나면 노조가 나서서 월급을 자진 삭감하는 나라,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 국민 소득이 우리의 4배가 넘으면서도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우리보다도 작은 나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이자율이 0%에 가까워도 은행에 저축하는 나라,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다시 지지 않기 위해 과학기술·산업·통상 외교 분야에서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는 무서운 나라이다.
사무라이의 문화에서 유래된,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일본은 요즈음 막강한 국력과 미국과의 공고한 동맹 관계를 배경으로 독도망언,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 사할린 영토 반환 요구 등 이웃 국가에 일본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수백 개의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원자탄과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나라이다.
외국에서 사들여온 무기와 군인 숫자에 의존하는 우리의 군사력은 미국의 도움 없이 한 달도 전쟁을 치를 수 없다.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사력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일본의 망언을 저지하고 진정한 사죄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과학기술에서 강해져야 한다.
우성일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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