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수(사진)씨의 소설집 ‘누드크로키’를 읽는 내내 한 마리 비루한 짐승의 허상에 시달리곤 했다. 이미 기진(氣盡)해 까라져버린 채 다하지 않은 맥(脈)만 간헐적으로 움찔대는, 그 생명의 습관 같은 경련으로 하여 더 처연한 어떤 짐승…. 진저리 쳐지는 삶의 악력 같기도, 피학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기묘한 쾌감 같기도 하던 그 불편한 느낌은, 경험칙상 결코 쉬이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으앙~" 하고 울어버리기만 하면 누군가 와서 토닥거려 주며 그 어떤 가위눌림에서도 벗어나게 해주던 시간들을, 우리는 이미 삼십 년 저쪽에 머무는 동안 잃어버린 탓이다.
"왜 나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응당 지니고 사는 일상적인 꿈들을 키워가지 않는가? 그 꿈들도 충분히 아름답고 절박하며 때론 처절한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p.19) ‘롱아일랜드에 갇힌 사내’의 주인공 ‘나’의 꿈은 "등 푸른 고등어가 되어 검푸른 바다 속을 유영하는" 따위이다. 또 당장 오늘부터 시작되는 휴가 동안 롱아일랜드로 여행하는 것이기도 한데, 비교적 손쉬운 그것이 ‘꿈’인 까닭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여자가 이미 떠난 뒤이기 때문이다. 이 통속적이고 진부한 꿈의 좌절이 ‘등 푸른 고등어’라는 비범하고 비일상적인 꿈으로 비약하는 경로는, 휴가기간 내내 출구 없는 지하철 속을 헤매다 회사로 복귀한 ‘나’가 컴퓨터 모니터를 켜는 순간 열리게 된다.
작가는 꿈이 비약하는 경로를 친절히 안내하지 않는다. 다만 결행의 충동적 의지만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어떤가. 고등어가 되자면 ‘뭍’을 떠나야 한다. ‘바다’를 꿈꾸는 이 아가미 없는 짐승의 슬픈 미래는, 그 꿈을 충동질하는, 바다 및 모니터를 대면한 자의 운명 같지 않은가. 그리고 둘러보라. 이 땅은 이미 모니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우리는 그 요염한 갈매 빛 환상의 유혹에 사로잡힌 ‘나’이지 않던가.
작품집에는 뒤죽박죽된 일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에게서 그림자가 도망치고, 도망치는 그림자를 쫓아 달려가는 ‘나’가 있고(‘그림자가 달아난다’), "연마용 줄처럼 생긴 이빨을 동족의 목에 깊숙이 찔러 넣은 바다이구아나처럼 식식거리며 앞으로 마구 달려나가는" ‘그’도 등장한다.(‘종의 선택’)
표제작 ‘누드크로키’의 주인공인 H는 자신의 스틸 사진 일부가 조작돼 음란사이트에 도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송을 준비중인 서른둘 된 여자다. 모델로서의 절정, 혹은 ‘나르시스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관성처럼 일하며 지내온 그녀는, 한편으로 마지막 기회이니 누드집을 내자는 기획사의 은밀한 제의까지 받아둔 상태다. 모델대에 선 어느 날, 크로키북에 그려진 나신의 부분들이 지워질 때마다 자신의 몸도 지워져 가는 일이 발생한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크로키 북들! 모델대 귀퉁이에 놓인 H의 휴대폰이 울린다. J선생이 받는다… 당신이 찾는 여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워져 버렸으니까요." "그녀가 입고 온 블루벨벳이 유령처럼 휘날리며 실기실 밖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H의 마지막 아우성인 듯,…"(p.108)
작가의 의도가 "정보사회의 구성원은 정보 메커니즘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며, 나아가 컴퓨터의 코드기호처럼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p.335 해설)자 했든 말든, 이 작품이 주는 느낌 역시, 한 짐승의 스러져가는 맥박의 움찔댐 혹은 마지막 숨결의 헐떡임이었다. H는 화가의 허망한 손놀림으로 지워졌고, ‘70대의 장엄한 나신’으로 모델대에 위엄 있게 서고자 했던 그 꿈 역시 30대 초입에 좌절했다.
이제 절망적 선택의 순간이다. 꿈을 향해 미친 탈주를 감행할 것인가, 지우개 앞에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내맡길 것인가. 그 선택은 ‘평범한 직장인들이 응당 지니고 사는 일상적인 꿈’이 아닌, 무엄한 꿈을 꾸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다. 그러니 아직 가위눌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소년들이여, 꿈을 버려라!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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