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이 ‘달콤한 인생’의 영감을 얻은 곳은 고속도로 화장실이다. 지난 주 인터뷰(24일자 27면)에서도 언급했듯, 영화의 시작점은 어느 화장실 문에 붙어 있던 문구.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딱 들어 맞는다. 주인공 선우(이병헌)가 겪는 고난은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선우의 마음이 흔들린 탓이다. 그 설명을 들으며 "힘 주기도 바쁜데, 화장실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시네요"라고 지극히 범인(凡人)답게 대꾸했다.
지난해 어느 눈 오던 봄날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날씨가 미쳤군"하며 약 5초간 창 밖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날 허진호 감독은 봄꽃 위에 내려 앉는 눈의 이미지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으로 꺼내 놓았다. ‘4월의 눈’(April Snow). "봄을 좋아하는데 겨울의 눈도 좋아하니까, 봄에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대사에서처럼 4월의 눈은 영화를 압축하는 이미지다.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지고 싶은 사람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기에 절묘하다.
아름다우면서 잔인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사회면에 난 신문 기사에서 시작됐다. 1988년 엄마에게 버려진 4남매 이야기로 사회는 온통 들끓었지만 이내 잊혀졌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이야기를 15년이 지나도록 가슴에 담고 있다가 영화 ‘아무도 모른다’로 만들었다.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는 단순하다. 세상 끝난 듯 즐거워 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다가도 대부분 잊는다. 지하철 속에서 여승무원 살해기사를 읽고 분노했고, 겨울 코트와 가벼운 봄 옷이 뒤섞인 행인들의 옷차림에 재미있어 했으며, 마감시간에 쫓기는 일상이 잠시 지긋지긋했지만, 하루만 지나면 모두 잊혀진다. 범인에게 일상은 일상일 뿐이다.
그 일상적 에너지를 삼키고 있다가 비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이거나(‘달콤한 인생’), 슬프고도 아름답거나(‘외출’), 예쁘면서도 가슴 아픈(‘아무도 모른다’) 복잡한 감정으로 뽑아 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흔히 쓰는 말 예술적 승화. 보통 사람의 가슴 속에서는 액체 상태로 울렁거리고 말았을 에너지를 특별한 모양으로 변환시키는 재주에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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