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이가 짧은 잠방이에다 짚신을 신은 채 공터에 뛰어든 선수들은 비록 무명천을 감아 만든 공에다 헝겊으로 만든 손싸개로 글러브를 대신했지만 승리를 향한 눈빛 만큼은 매서웠다. 1906년3월15일 맨땅이나 다름없던 서울 동대문의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서 황성YMCA야구단과 덕어(독일어)학교가 벌였던 우리나라 첫 ‘베쓰뽈’ 경기의 진풍경이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한국명 길례태)가 황성YMCA 회원들에게 야구공을 처음 쥐어준 지 올해로 꼭 100년. 한국야구 100년사에는 근대사의 수난과 함께 군사독재와 외환위기 등에 내쫓기던 시절 서민의 애환과 희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일제 강점기에 걸음마에 나선 한국 야구는 자연스레 저항의 영양분을 먹고 자랐다. 전조선야구대회가 인기를 끌던 1920년대 성동 원두의 서울 경성운동장(현 동대문구장)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백구의 향연을 통해 식민지 국민의 울분을 쏟아냈다.
한국 야구는 해방 공간을 무대로 본격적인 성장을 구가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조선인들의 민족대회를 막으면서 암흑기에 빠져들었던 한국 야구는 광복 이후 잇따라 생겨난 각종 야구대회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동네야구’ 수준에 머물던 한국 야구가 세계의 ‘눈’을 뜬 것은 1958년이었다. 10월21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구장)에는 한국일보 초청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팀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한국대표팀의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감탄사를 연발하던 스탠드에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정운찬 서울대총장도 끼어 있었다. 현재 한국야구위원회(KBO) 고문직을 맡을 정도로 야구 마니아인 정 총장은 "아직도 그 경기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60, 70년대는 고교야구의 전성기였다. 1960년 홈런타자 백인천 전 롯데 감독이 이끄는 최강 전력의 경동고가 전국 대회를 휩쓸면서 붐을 이끌었던 고교 야구는 70년대 들어 황금기를 맞이했다.
1979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9회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는 8월5일부터 16일 간 단일대회 최대 관중인 총 49만1,200명(한 경기당 3만700명)이 꽉꽉 들어찰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고교야구가 뿜어낸 이 같은 에너지는 1977년 슈퍼월드컵 제패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 등 한국이 아마추어 야구 강국으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더 이상 아마 야구의 불꽃은 타오르지 않았다. 1981년 8월26일 경북고와 선린상고의 봉황대기 결승전. 1회말 홈으로 슬라이딩하다 왼쪽 발목뼈가 부러지면서 숱한 여학생 팬들의 눈물 속에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던 박노준과 함께 고교야구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교 야구에 교차하던 환호와 탄식은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로 옮겨갔다. 개막전 이종도의 결승 만루홈런으로 닻을 올린 프로야구는 박철순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등 걸출한 스포츠스타들을 배출하면서 새로운 국민 스포츠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출범 24년째를 맞는 프로야구는 한국 사회의 격동적인 자화상이다. 신군부세력의 우민화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태어난 프로야구는 지역감정이 휘몰아치던 1980년 대 중반 연고 팬들 간 폭력사태로 얼룩졌다. 거품경제의 버블이 터지기 전인 1995년 500만 관중시대를 열었던 프로야구는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 등에 따른 관중 감소에 애를 태우고 있다. 지난해에는 병풍 파문까지 그라운드를 휩쓸고 지나갔다.
한국 야구 100년사를 장식하는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선수들의 해외 진출. 1990년 후반 광속구로 메이저리그를 풍미했던 박찬호를 비롯해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등 해외 진출파들을 통해 ‘코리아브랜드’의 가치가 드높아졌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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