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장, 강동석 전 건교부장관…. 하나같이 본인이나 주변의 부동산 투기의혹 등 재산형성과정이 석연치 않아 물러났다. 고위공직자의 잇따른 낙마는 백지신탁제의 도입을 재촉하고 있다. 정치권도 4월 임시국회에서 공직자윤리법개정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여야는 공직자의 부패를 막을 백신이라며 백지신탁제 도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해묵은 논란은 여전하다. 당장 사유재산 침해논란 속에 위헌 시비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직무상 관련’이란 규정도 보기에 따라 정반대 해석이 가능하다. 준비도 없이 여론만 쫓아 법 제정을 서두르다 보니 주요 쟁점에 대한 정리가 거의 안된 셈이다.
백지신탁제란 국회의원, 장관 등 고위공직자들이 직무와 관련해 얻은 정보로 부당하게 치부를 하지 못하도록 재임기간 중 재산을 법에 정한 신탁기관에 맡기고 재임기간 중 매매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다.
여야는 17대 국회 들어 사유재산권의 침해가능성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처리를 미뤄왔다. 2월 임시국회 때도 국회 법사위에서 몇 차례 회의만 하다 손을 놓았다. 1년 가까이 진전이 없었던 것은 여야가 의원들의 재산권 행사에 재갈을 물리는 백지신탁제 도입을 부담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부동산 투기의혹 등으로 고위공직자들이 줄줄이 낙마하고 지난 2월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의 재산변동 공개이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정치권은 4월 법제화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우선 신탁 대상인 ‘직무와 관련된 주식’이란 규정부터 지극히 모호하다. 공직자의 주식거래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므로 보유주식의 직무관련성 여부를 모두 따져야 하는데 판단이 쉽지않다. 정부안만 보더라도 재산공개 대상이 되는 공직자는 주식총액이 일정액을 넘으면 직무관련여부에 상관없이 우선 주식백지신탁계약을 하도록 하고 있다. 공직자는 이후 주식백지신탁심사위로부터 자신의 주식이 직무와 무관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백지신탁을 해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신탁기관이 해당주식을 이미 처분했을 경우 책임소재가 애매해진다.
이런 식의 딜레마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처럼 경영권 확보를 위해 해당 기업 주식을 갖고 있을 경우도 처리가 복잡하다. 여야는 예외로 인정해줄 생각이지만, 형평성 시비가 생길 수 있다.
신탁대상이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대로 부동산으로 확대되면 더욱 복잡하다. 신탁대상 공직자란 이유로 재임기간 중 부동산 처분을 아예 못하게 하거나, 제한한다면 당장 사유재산권 침해시비가 일 수 있다. 단순히 부동산을 재임기간 중 신탁만 해두는 것만으로는 별 효과도 없다.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부동산 가격이 올라도 별다른 제재수단이 없는 만큼 부당증식을 막겠다는 법 취지가 무색해진다. 한나라당 혁신위는 궁여지책으로 "거래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요소가 있으니 대신 취득이나 매각 때 바로 공직자윤리위에 신고하도록 하자"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당은 이 역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쪽이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 공직자 주식보유 실태 /장·차관 66명중 26명이 주식보유
고위 공직자의 주식 보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 관련성이다. 공직에 종사하며 얻게 된 각종 정보를 개인의 재산증식 수단으로 악용해서는 안된다는 점 때문이다.
최근 참여연대는 장·차관급 공직자 66명 가운데 26명이 주식을 보유하거나 거래중이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직무관련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과 김병준 정책실장이 각각 2,000만원, 3,000만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참가하는 지위임을 들어 직무관련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또 장병완 예산처 차관과 윤증현 금감위원장 등의 경우 본인과 배우자, 자녀의 주식거래에 대해서도 "경제관련 부처 종사자이기 때문에 주식과 직무 사이의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주식 9,000여주 등을 보유하고 있는 진대제 정통부 장관과 부산시 부시장 재직 당시 매년 1억~2억원에 달하는 주식을 거래한 오거돈 해수부 장관도 도마에 올랐다.
국회의원들이 보유한 주식의 직무관련성도 비판 대상이다. 정무위·재경위·과기정위·건교위 등 경제관련 상임위원 상당수가 본인과 배우자 명의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현대 계열사 주식을 보유한 재경위 이계안(열린우리당) 의원, 아시아나항공 주식을 보유한 건교위 김학송(한나라당) 의원 등은 직무관련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정무위 소속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이 지난해에 은행주식 7만주를 새로 매입한 것도 논란거리다.
부동산의 경우 보유 자체보다 위장전입과 개발정보 악용, 은닉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올 들어서만 이기준·이헌재 부총리와 강동석 건교부장관, 최영도 인권위원장 등이 낙마했다.
지난달에 공개된 ‘공직자 재산변동 신고내역’을 보면 재산이 2억원 이상 증가한 정부측 인사 상위 20명 가운데 12명의 재산 증가 이유가 토지수용에 따른 보상이나 부동산 매도였다. 김세호 건교부차관은 6억3,000여만원으로 신고했던 땅이 택지로 수용되면서 18억2,000여만원에 팔았고 신도시로 개발중인 판교에 보유했던 배우자 명의의 땅을 팔아 상당한 차익을 남긴 공직자도 적지 않았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재산형성 과정까지 "소명하자" 논의 활발
최근 백지신탁제 못지않게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공직자의 ‘재산 형성과정 소명 의무화’다. 재산신고·공개만 할 게 아니라 재산 형성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사전에 검증하자는 것으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투기의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여야는 표면상으로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열린우리당은 김한길 의원의 대표발의로 재산등록일 기준 5년간의 재산 증감에 대한 증빙자료 제출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논의중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회의원 등과 지자체장이 대상이다. 김 의원은 이들의 직계 존비속에 대해서도 재산공개를 의무화하고 소명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입장이지만 당내 반발이 적지 않아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방안은 좀 더 구체적이다. 행자위 간사인 이인기 의원은 재산공개 대상자 본인과 직계 존비속에 대해 과거 10년간의 재산 출처와 재산 형성과정에 대한 소명자료 제출 의무화를 주장하고 있다. 재산총액과 재산의 취득경위 및 시기, 소득원 등을 자산·부채, 수입·지출 등으로 분류해 대차대조표 형식으로 제출토록 했다.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 등도 재산 형성과정 소명을 의무화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4월 임시국회 때 결론이 날 지는 미지수다. 재산 소명을 통해 의혹에 휘말릴 소지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개인사까지 낱낱이 공개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권에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여야가 법 적용시점을 국회 협의과정에서 조정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美선 어떻게/ 딕 체니 부통령 취임 직후 CEO 사임하고 주식 매각
미국과 캐나다는 고위공직자의 주식 직무관련 재산에 대한 백지신탁제를 도입한 대표적 국가이다. 미국은 우리의 공직자윤리법과 유사한 정부윤리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대통령과 부통령, 연방의원, 연방지법 판사 이상의 법관은 물론 우리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GS-15등급 이상의 공무원은 재산등록대상자에 해당된다. 이들은 정부윤리청(OGE), 상·하원 윤리위원회 등에 자신의 재산을 신고해야 한다. 등록의무자는 신고 당시 주식 등이 직무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처분·반환하거나 백지신탁해야 한다. OGE는 그러나 백지신탁 등을 처음부터 줄이기 위해 가능하면 보유주식 등 재산과 관련된 직무나 직책은 맡지않을 것을 권유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이나 부통령, 상·하원 의원 등은 직무회피나 전보 등의 조치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이들이 소유한 주식 등에 대해서는 백지신탁이 주로 시행된다.
딕 체니 부통령이 취임직후 석유회사인 홀리버튼의 CEO를 사임하고 주식을 매각한 것이 한 예다.캐나다도 공직자의 이해충돌과 퇴직후 고용에 관한 법률에 백지신탁관련 조항이 있다. 적용대상은 총리, 장관 등 각료 전원과 정무직 참모 등 관리자 위치의 공직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 중 정부의 정책결정에 의해 가치의 영향을 받는 주식, 스톡옵션, 외화, 선물 등 이른바 ‘통제자산’으로 분류된 것들은 법에 따라 공직취임이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해야 한다.
이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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