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발권력은 전가의 보도?’
신용불량자 구제를 위해 한국은행의 돈을 활용한다는 정부 방침과 관련, 발권력 남용 논란이 일고 있다. 툭하면 돈을 찍어 문제를 해결하고 더구나 법적 제한을 피하기 위해 편법 ‘쿠션(우회)’지원을 반복함으로써 발권력이 원칙없이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7일 관계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주 발표한 신불자 대책에서 기초생활보장 대상 신불자들의 불량채권을 자산관리공사가 매입하되, 이에 필요한 자금(최대 760억원)을 한은으로부터 대출받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문제는 한은법상 중앙은행 대출은 금융기관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아닌 자산관리공사는 대출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 결국 정부는 고심끝에 한은이 산업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산은이 이 돈을 자산관리공사에 주는 ‘쿠션대출’방식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이런 우회지원은 위법은 아니더라도, 법이 정한 금융기관 이외의 곳에 돈을 대출해준다는 점에서 명백한 편법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금융통화위원회가 산업은행에 대한 대출 자체를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발권력 우회동원은 역사가 깊다. 1989년 12·12조치가 그 대표적 사례. 주가부양을 위해 정부는 투신사에게 무제한 주식매입을 지시하면서 2조7,000억원의 한은특융을 제공했다. 다만 투신사에 한은이 직접 자금을 지원할 수 없어 은행이 다리 역할을 맡았다. 결국 한은→은행→투신사→증시의 다단계경로를 통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주식을 사들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환란 직후 외환은행 우회출자도 비슷한 경우이다. 1999년 코메르츠방크는 외환은행 인수조건으로 기존 대주주인 한은의 증자참여(3,360억원)를 제시했지만 ‘영리기업 출자불가’란 법 조항이 가로막자 정부는 한은이 수출입은행(비영리은행)에 출자하고 수출입은행이 이 돈으로 외환은행에 출자하는 ‘쿠션’증자 방식을 고안해냈다.
우회지원은 아니지만 지난해엔 정부요청에 따라 주택금융공사 자본금으로 2,000억원이 넘는 발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정부는 모두 국가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인 만큼 발권력 동원이 문제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이번 신불자 지원자금의 우회대출에 대해서도 재경부는 "한은 측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쳤으며 한은에서도 법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사항"이라고 밝혔다.
엄밀히 말하면 신불자 지원은 재정이 맡아야 할 몫이다. 아무리 신불자 문제가 심각해도 한은이 돈을 찍어 빚을 덜어주는 것은 이상하지만, 정부는 재정이 빠듯하니 한은이 좀 도와줘야 한다는 시각이고 이런 발상엔 기본적으로 ‘발권력은 재정의 보충수단’이란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재정과 발권력은 각각 고유의 역할이 있으며, 재정의 몫을 떠넘기는 것은 정책 편의주의란 지적이 많다. 한은 관계자는 "급하다고 돈을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굳이 지원대상과 용도를 정한 한은법은 왜 존재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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