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육군3사관학교 졸업·임관식 연설에서 한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시아 균형자론에 대한 반향이 크다. 이제 한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며,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변화될 것"이라는 짤막한 표현이 왜 그렇게 우려감 섞인 해석과 평가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하나는 ‘선택’이라는 말이 풍기는 의미에 관심이 커서 그렇다. 이제까지 한국이 미국과 일본과의 긴밀한 외교·안보 관계를 맺고 그 토대 위에서 북한과 중국 등 대륙 세력과의 관계를 설정해 오던 전통적인 전략 구도를 탈피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집권 초기에 과거는 더 이상 묻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만 함께 전진해 가자고 했는데도 그 선의를 묵살하고 해묵은 신사참배, 교과서 문제에 더해 독도 문제까지 들고 나오는 데 대해 한국이 마냥 우호적인 파트너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안심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또 미국에 대해서는 북한 핵 문제 해결 방안과 주한미군의 새로운 역할을 협의함에 있어 모든 것을 미국의 전략에 맞출 수는 없으며 때로 동맹국끼리도 다른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덤으로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설문이 내포하고 있는 좀더 큰 논란거리는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동북아의 세력 판도가 과연 바뀌겠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이 동북아의 세력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주변 나라들이 한국의 그러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지금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것도 충분히 구비하지 못한 상태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크기도 아쉽지만, 한국이 막상 미국, 일본과 거리를 둔다고 해서 중국, 러시아가 한국을 끌어안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이들은 오히려 남·북한과 동시에 국교를 수립해 놓고서 이슈와 상황에 따라 적절히 협력 대상을 교체하는 철저한 실리 위주의 한반도 정책을 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 추구는 한국인이 처해 온 국제 환경에서 나온 최선의 방책이라는 점에서 당위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렇게 긴요한 국가 대전략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선언만 할 때 부작용이 따르는 이상론이 되어 버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 한때 한민족은 중국에 사대함으로써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지킬 수 있었다. 그 때 우리의 눈에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일본의 침탈과 남북 분단, 공산화의 위협에 맞서며 미국과 동맹을 맺은 후 50년이 넘은 지금, 한국은 훨씬 넓고 복잡한 국제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은 중국도 미국도 아니요, 이제 우리 한국이 되어야 한다는 대망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주관과 가치에 바탕을 두고 바라보되 실제 이상으로 자신의 능력과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지금 봉착한 중요한 문제부터 한국이 풀 수 있을 때 지역 균형자 역할도 자연스레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북한 핵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풀지 못하고 미국이나 중국이 억지로 풀어야만 하는 사태가 와서야 한국은 미국과의 파트너십을 지켜내기도, 중국과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남북이 민족 공조를 하기에 앞서 주변 세력들과 공조하지 못하면 한반도 비핵화도, 통일도, 아무 것도 해 내지 못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24일 여야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한미동맹은 잘 지켜낼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균형자 역할은 미국이라는 외부적 균형자와 손발을 맞추지 않고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미 공조에 균열이 가지 않으려면 말보다는 정책을 조율해야 한다.
김태효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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