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가운데 회색의 자리는 넓다. 흑과 백 사이의 넓은 공간이 모두 회색의 차지다. 명도 10의 진짜 흰색, 명도 0의 진짜 검은색을 양쪽 끝에 둔 수직선을 생각하면 점으로 나타나는 0과 10 사이가 사실은 모두 회색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회색의 폭은 이보다는 훨씬 좁다. 0에 웬만큼 가까우면 검은색이라고 해버리고, 어느 정도 10에 가까우면 그냥 흰색으로 여긴다. 아무리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여도 그 많은 회색의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회색의 자리가 좁아진다.
■ 어떤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절대로 그렇다’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응답보다는 ‘대체로 그렇다’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다. 흔히 조사 결과는 ‘절대로’와 ‘대체로’를 합친 ‘찬성 ○○%’라는 식으로 보도된다. 그러나 ‘대체로’가 같은 쪽의 ‘절대로’보다는 오히려 반대 쪽의 ‘대체로’와 가까울 때가 많아 정확한 응답 분포를 확인하지 않으면 판단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되도록 찬반으로 묶어 보려는 잠재의식이 워낙 뿌리 깊어 ‘회색론’의 자리를 좁힌다.
■ 그나마 ‘중간론’ 이라면 괜찮게 들리지만 ‘회색론’이라면 가까이 해선 안될 듯한 느낌을 준다. ‘중간’이 부정적 어감을 가진 ‘극단’과 대비될 수 있어서 일종의 면책특권을 누리는 것일까. ‘회색’만으로도 좋지 않은 어감은 우리말의 ‘잿빛’으로 바꾸면 더하다. 그러나 ‘A와 A 아닌 것 사이에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서양 논리학의 ‘배중률’과 달리 동양에서는 ‘비승비속’(非僧非俗)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 인식의 중간 지대를 폭 넓게 인정해 왔다. 개인과 사회의 정신 건강이 그런 인식 틀에 힘입은 바 크다.
■ 독도문제에 기운 국민적 열기가 정서적 건강성을 잃어가고 있다. 영토주권의 문제라는 특수성으로 보아 애초에 반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시마네현의 태도가 일본 정부와 국민의 뜻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갖는 것인지, 국민적 반발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회의론’, ‘회색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도 조금만 회의를 내비치면 마구 ‘친일파’라고 몰아붙인다. 순도 100%의 열기는 아무리 그것이 역사와 민족의 이름을 내걸어도 광기일 뿐이다. 일제 군국주의나 나치즘이 다 그랬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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