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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경제성장은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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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경제성장은 신기루"

입력
2005.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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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근대화 문제는 역사학계와 경제사학계가 꽤 오랫동안 공방을 벌여온 주제다. 논쟁은 식민지 시기 성격 규정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학계의 갑론을박 치고는 과분한 대중의 관심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립각이 예리한 데 비하자면 내용은 다소 지루했다고 할 수 있다. ‘개발’과 ‘수탈’로 초장부터 문제를 보는 시각 차이가 너무 확연했고, 논쟁의 소주제가 그때그때 다르긴 했지만 핵심은 그대로 평행선을 내달렸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경제 통계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경제사학계의 활발한 연구 덕에 ‘식민지 근대화론’의 목소리가 커 보였고, 그 중심에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1980년대 후반에 토대를 닦은 낙성대경제연구소(옛 낙성대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전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부닥친 조선후기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일제시기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경제사학계가 경제수치라는 실증 자료를 풍부하게 제시한 것 때문에 역사학계의 주장이 다소 공허해 보인 측면도 없지 않다.

허수열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은 다소 뻔해 보이는 일제 근대화론 논쟁에 새로운 장을 열 역작으로 평가할만하다. 낙성대연구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그는 경제사학계가 개발을 강조하기 위해 주 무기로 삼는 통계와 그래프를 앞세워 반대로 그 개발이 얼마나 큰 수탈이었는가를 입증하려고 했다.

허 교수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해서 일제하의 조선 경제를 분석했다. 우선 세계 전체가 저성장의 시기였던 양차 대전 사이에 4%를 넘는 조선의 성장률은 드물게 높은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 갔는가를 따진다. 또 하나는 일제의 강점이 끝난 뒤 그 성장의 결과물이 광복 이후 한국 경제의 토대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허 교수에 따르면 일제 강점 시기에 농업생산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1910년 이후 30여 년 동안 미곡생산량이 52.3% 증가한 데 비해 조선인 농업인구는 63.8% 늘어나 농업인구 1인당 미곡생산량은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다, 일본인들이 비옥한 경작 지역에 집중해 조선 논의 5분의 1을 소유하고 있어 조선인에게 돌아갈 소득은 매우 적었다. 근대적 공장공업이 발전했지만 그것도 80%가 일본의 소유였다. 성장이라는 외투를 입었지만 실제 개발의 과실은 일본인의 손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광복 직후 조선이 1인당 국민총생산이 616달러로 1911년(777달러)에도 못 미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러한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일제하의 성장이 ‘개발 없는 개발’이며, 실제로는 종속과 차별을 강요하고 그런 구조를 항구화 하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명제가 타당하다면, 일제시대의 개발이라는 것이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이고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조선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는 개발을 식민지적 개발로 대체한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의 개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조선인 자신에 의한 개발을 저해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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