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한국은 노동력 유출국에서 유입국으로 전환한다. 동남아 등지의 젊은 인력들이 ‘환율의 마법’에 이끌려 기회의 땅 한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90년대 초까지 이들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않았고, 91년 11월에야 마지못해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하의 이주노동자는 ‘근로자’가 아닌 ‘연수생’ 신분이다. 편법으로 인력수입을 용인한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2004년 8월 실시된다. 그것은 일부나마 이주노동자에게 ‘근로자’의 지위를 부여한, 다시 말해 노동3권을 보장하고 산재보상보험법과 최저임금법 적용 대상으로 포용한, 진일보한 조치였다. 그 세월동안 이들 이주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체임과 산업재해 폭행 성폭행 등 인권침해와 차별은 극심했다(설동훈-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 ‘우리 시대의 소수자운동’). 또 그것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는 있지만, 80년대 이전까지 우리의 전(前)세대들이 바다 저편에서 겪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박범신(사진)씨의 장편소설 ‘나마스테’는 이들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꿈의 땅 한국이 이들에게서 빼앗은 것과 준 것을 네팔 출신 남자와 한국인 여자의 사랑을 통해 전면화한 소설이다.
스물 다섯 살 청년 카밀과 서른 살의 ‘나’ 신우는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끌어안는 과정이다. 소설에는 네팔의 가난과 그들의 절박한 ‘코리안 드림’, 이주 뒤 겪는 비인간적·비인격적 체험 등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여자 역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주했다가 92년 ‘LA폭동’으로 아버지와 둘째 오빠를 잃었고, 결혼에 실패한 아픔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네팔의 설산 ‘카일라스’, "고통도 기쁨으로 바뀌고 시간도 느낄 수 없"다는 그 성산(聖山)을 가슴 속에 품고 행하는 ‘제의적 퍼포먼스’처럼 이어진다. 그들의 만남 역시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돌아보면 우연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카르마(業)의 예술이다."
한국 정부는 고용허가제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법 시행 전 4년 이상 된 불법체류자들을 강제출국시킨다. 이주노동자들의 농성과 자살이 이어지는 와중에 카밀이 분신자살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좌절한다. 소설은 신우가 낳은 카밀의 유복자 애린이 자라 아버지의 네팔 고향마을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티베트 말로 몸이 뤼예요, 뤼. 떠난 뒤에 남는 것. 우리는 뤼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이고, 삶은 우리가 몸을 떠난 뒤에도 계속돼요." 티벳 불교, 힌도 신들이 가르친 삶의 경구들이 이정표처럼 이야기의 구비구비에 놓여 감동을 더한다.
진보학계는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해 여전히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업연수제도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개인적 인식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나마스테’는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다시 만나요 등, 만남과 소통의 시작을 알리는 네팔 말이다. 이 땅의 ‘카밀들’은 여전히 ‘나마스테’의 바깥에서 배회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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