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절에는 단식이 독재와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초 정치활동을 규제 당하고 자택에 갇혀 있던 김영삼씨나, 당시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었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이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방법이 단식이었을 것이다. 권력집단에 의한 정치적 독재나 분배의 불평등구조 등에 대하여 항의하고 시위를 해보았자, 온갖 물리력과 악법을 동원해 또 다시 옭아 매이고 마니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단식 같은 투쟁방법이 가져다 주는 효과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단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그런 만큼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 역시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적게 걸린다. 그러나 여기에 자충수의 함정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과정과 절차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분쟁의 당사자들이 서로 모여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를 해야 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합의가 힘들면 최선의 선택이 아닌 차선책이라도 도출해내야 한다. 이건 교과서적인 이상론이 절대로 아니다. 선진국들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 결정은 번복될 여지가 많다. 단식은 합리적 동의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어떠한 결과도 절대 사회적 합의나 차선책이 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른바 ‘참여정부’라고 하는 현 정권 하에서 행해진 주요정책을 돌이켜 보면, 대화와 합의과정을 거친 결정보다는 물리적 힘의 대결이나 단식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결론 지워진 사례가 많다. 어느덧 잊혀져 가는 기억이지만 지율 스님의 단식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 분은 본인의 생명을 걸고 단식을 감행함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 내고 그 결과로 천성산을 지켜 냈지만, 이로 인한 온갖 후유증은 앞으로 나머지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다. 국민들이 관심은 가졌지만 그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대화와 토론에 의한 합의보다는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마치 우리사회의 갈등 해결책처럼 일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시작된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과 이어 달리기처럼 연이어 계속된 심재철 의원의 단식을 보라. 이들의 단식은 법을 만들고 준수해야 할 국회의원 마저 스스로 자신들이 만든 법을 무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역할마저도 포기한 치기어린 행동밖에 더 되는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정치인들을 통해 지난 세기의 정치행태를 다시 보는 것 같아 도리어 불쾌하기만 하다. 아무리 이 법안에 반대를 하고 본인들의 정치생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극단적 방법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설득력이 없다. 또 다시 국민들에게 상처를 주고 정치에 대한 염증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어느 인터넷기사의 댓글에서 ‘전재희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금배지를 포기한 박세일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밀자’는 농담 섞인 주장을 본 적이 있다. 필자도 장난 섞인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 전재희 의원이 그 글에서처럼 진짜 대통령이 되어 정치가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 또 다시 단식을 하게 된다면 그 동안 국정은 누가 책임질까.
절대 단식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단식하며 주장하는 의견에 동의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들로 인해 국민들마저도 3류로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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