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시위가 계속돼온 키르기스스탄에서 ‘레몬혁명’의 성공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이어 구 소련권 국가에서 3번째의 정권축출이다.
반정부 시위가 수도 비쉬켁으로 확산한 이틀째인 24일 키르기스는 정부종합청사와 방송국이 시위대에 점거되는 등 무정부상태로 치달았다.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으로 도피했고 니콜라이 타나예프 총리가 사임하는 등 집권세력은 붕괴했다.
반정부 시위대 5,000여명은 비쉬켁 중심가로 몰려나와 아카예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다 그 중 1,000여명이 중앙정부청사로 쳐들어가 건물을 장악했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시위대가 정부청사에 밀려들어가자마자 경비병력들이 별 충돌 없이 퇴각했다. 청사 안에 있던 정부관리들도 대부분 뒷문으로 도망쳐 나왔으나, 에센 토포예프 국방장관은 시위대에 붙잡혀 강제로 끌려 나와 돌팔매를 맞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서구식 민주혁명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미국과 유럽이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유보하고 있다. 아카예프 대통령이 9·11 직후 미군 기지를 수용하는 등 친미노선으로 기울고 있었고, 반정부 세력 가운데 이슬람 급진 세력이 참가하고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일단 시위사태를 촉발한 2월, 3월 두 차례 총선 결과는 무효화됐다. 대법원이 총선 무효를 선언했고, 의회는 "25일 회의를 소집해 새로운 대통령 선거와 총선 일정을 논의하겠다"고 발표했다. 톱추벡 투르구나리예프 인민행동당 의원은 "가을에 총선을 재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키르기스 정국이 쉽게 안정을 찾을지는 불투명하다. 횡령 혐의로 2000년 투옥된 펠릭스 쿠로프 전 부통령 등 반체제 인사들도 속속 출감하고 있으나, 다양한 야당 정파를 한데 결집시킬만한 지도력이 있는지도 미지수다. 옛 소련 국가였던 주변 국가들도 키르기스 사태에 자국민이 동요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 국제사회의 개입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 아카예프 대통령은…/ 한때 "중앙亞 민주주의 희망" 극찬
아스카르 아카예프(사진) 대통령은 1991년 키르기스스탄이 독립했을 당시만 해도 서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이라고 극찬을 들었던 인물이다. 집권 초기 사유재산제와 토지개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 구 소련 통치 당시 대통령으로 처음 취임했을 때도 그는 자유주의를 신봉한 인물로 인식됐다. 신문 편집장을 지낸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그에 대한 비판기사를 썼을 때도 그는 나에게 찾아와 실패를 지적해 줘서 고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그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아카예프는 1944년 11월 키르기스 북쪽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6년 공산당에 입당, 과학부에서 부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했다. 1991, 1995년 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한 그는 헌법을 개정, 3선을 하면서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다.
야당 및 언론을 탄압하고 공무원들의 부패가 만연하면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2003년부터는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가족들의 부패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그는 미군 기지를 받아들이며, 측근에게 "나에게 미국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올 2월, 3월 총선에서 그의 아들과 딸이 모두 의회에 진출하며 75석 중 69석을 차지하며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권좌에 14년간 머물렀던 그에게는 헌법을 또 바꿔 대통령 4선을 노리거나 자녀에게 권력을 세습하려 한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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