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도 서서히 겨울이 걷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 능선의 꽃무리를 보는 것은 욕심이다. 꽃구경은 산 아래 절집으로 만족할 수 밖에. 이 땅에는 아름다운 꽃동산을 가꾼 사찰이 많다. 봄꽃은 피고 지는 기간이 짧다는 것이 흠. 서둘러야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볼 수 있다. 멋진 산행을 즐기고 노곤한 몸으로 부처의 꽃 세상에 안기는 것. 봄 산행의 으뜸 테마이다. 첫 순서는 산 아래 전체가 꽃마을을 이루고 있는 전남 순천시의 조계산이다.
조계산은 여행 마니아에게 있어 ‘1석 2조의 여행지’이다. 한국 불교계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3보 사찰 중 승보사찰 송광사가 이 산에 들어있다. 부처의 말씀을 담은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法寶)사찰로 불리는 해인사,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그리고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승보(僧寶)사찰 송광사가 조계종의 3보 사찰이다. 조계종 다음으로 세를 떨치는 태고종의 본찰인 선암사도 이 산 아래에 있다. 모두 1,000년이 넘은 고찰이요, 막강한 기운을 지닌 대찰이다. 한 번의 나들이로 의미 있는 두 절을 경험하는 것은 분명 ‘남는 여행’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1석 3조’이다. 조계산은 해발 884m의 낮지 않은 산이다. 아늑한 품을 가진 육산이다. 바위 투성이로 악명이 높은 호남의 대부분 산과는 다른 모양새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 자락이 깊다. 4~5시간의 다리 뻐근한 만족스러운 산행을 보장한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최고봉인 장군봉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사이 좋게 자리하고 있다. 한 절에서 올라 정상에 섰다가 다른 절로 내려온다. 세 가지를 연이어 경험한다. 송광사 쪽에서 올랐다. 절 앞을 지나는 계곡물이 충분히 불어있다. 흐르는 물 소리가 맑고 힘이 있다. 송광사는 개울을 건너야 절 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절이다. 승보사찰 답게 절에 기운이 넘친다.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충만하다. 대웅전 앞에서 매무새를 다시 여민다. 길게는 5시간이 넘는 산행의 출발점이다.
평지 같은 길을 20여 분 걸으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토다리 삼거리라는 곳이다. 왼쪽 계곡으로 바로 오르는 코스가 피아골이다. 지리산 피아골과 이름이 같다. 피아골에 들면 관광지와 송광사의 분위기가 걷힌다. ‘조계산이 있어 순천 시민들은 참 행복하겠구나.’ 산을 오르며 드는 생각이다. 길은 계곡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건너며 나 있다. 산행을 하기에 알맞은 경사이다. 인공 구조물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개울물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고 경사가 심한 곳은 원래 있던 돌을 대충 쌓아 계단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르기 딱 좋다. 이제 계절이 익으면 녹음이 우거질 터. 아무데나 앉으면 탁족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약 1시간, 행복한 상상을 하며 능선에 올랐다. 사방이 탁 터진다. 조계산의 연봉이 이어지고 끝 지점에 최고봉인 장군봉이 버티고 있다. 이제부터 주능선 종주이다. 장군봉까지 넉넉잡아 2시간이 걸린다. 주능선 종주는 기분 좋은 드라이브 같다. 물론 차가 아닌 다리로 걷는 길이다. 철쭉밭과 대밭이 계속 이어지고 그 사이로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 있다. 철쭉이 피면 더욱 장관이리라. 조계산의 대나무는 ‘신이대’라는 산죽의 일종이다. 화살을 만드는 데 쓰였다. 육산이어서 모두 흙길이다. 가볍게 뛸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거의 없다. 그런데 아직 뛰지는 못한다. 땅이 봄볕에 시커멓게 녹아 질척거리고 미끄럽다. 주능선 곳곳에 연산사거리, 장밭골 등 넓은 분지가 있어 쉬기 좋다. 바람에 꺾인 억새가 바닥에 깔려 있어 앉아도 좋고 벌렁 누워도 상관없다. 쉬엄쉬엄 콧노래를 부르며, 맑은 봄바람을 맞으며 2시간의 꿈 같은 능선 종주를 끝낸다.
장군봉에는 어른 몸통만한 정상 표지석이 서 있다. 근처에서 볼 수 없는 검고 단단한 차돌이다. 1990년 순천 농협 산악회가 세웠다. 산 아래에서 만들어 인부 두 사람이 번갈아 지게에 지고 산 위에 올려놓았는데 당시 5만원의 수송료(?)가 들었다고 한다.
장군봉에서 선암사로 하산길을 잡았다. 오르던 길과 마찬가지로 숲이 우거져 있다. 조금 경사가 있다. 급경사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다. 그렇지만 다리에 전혀 무리가 없다. 순천과 광주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많이 찾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찰은 언제나 공사중’이다. 선암사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눈보다는 귀가 먼저 안다. 중장비의 굉음이 들린다. 그리고 눈이 번쩍 뜨인다. 하얀 매화가 피어있다.
선암사는 ‘꽃밭 사찰’이라 불릴 정도로 온통 꽃동산이다. 매화가 가장 유명하다. 농원에 한꺼번에 심어 놓은 수입종이 아니라 우리 토종 홍매화이다. 대웅전 뒤쪽 산으로 오르는 길에 꽃길이 있다. 홍매화가 절의 돌담을 배경으로 피면 그냥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21일 현재 흰매화는 폈는데 홍매화는 봉우리에 물만 올랐다. 주말께 활짝 피리라는 한 스님의 말씀이다.
산행과 두 절집 순례의 마무리는 승선교이다. 보물 제400호로 선암사, 아니 순천의 상징처럼 유명한 돌다리이다. 지난 해 보수를 마쳤다. 돌다리를 해체해 다시 맞추었는데 옛모습을 조금 잃은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옆에 ‘마모와 훼손이 심해 빼놓은 돌’ 20여 개를 전시해 놓았다.
선암사길을 나와 주막에 앉았다. 하산주를 시켰는데 아주머니가 전화기에만 매달려 있고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들어보니 주말 예약을 받는 중이다. 한참 만에 상을 차리면서 하시는 말씀. "워매, 늦어부러서 미안해 워쩌까이. 이번 주말이 1년 중 가장 바쁜 때여. 벌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구마이."
조계산(순천)=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 조계산의 다른 등산로
조계산은 관리가 잘 된 산이다. 등산로도 사통팔달로 나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힘겹다면 주 등산로를 피하고 가벼운 코스를 선택한다. 송광사나 선암사에서 출발, 산의 4~5부 능선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는 트레킹이다. 주 등산로가 약 10km, 가벼운 코스는 8.2km이다. 송광굴목재, 선암굴목재 등을 거쳐 천자암에서 쌍향수(사진)도 구경한다. 어느 등산로든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중간에 조계산의 명물인 보리밥집이 있다. 산 속에서 맛보는 보리밥.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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