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을 낀 농촌의 목가적인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경기 양평군에 들어섰던 이들이라면 뜻밖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고 발길을 돌렸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검은 차량차단막으로 강을 가로막고 선 조악한 궁전 모양의 러브호텔들, 도로변에 줄줄이 어지럽게 서있는 매운탕집의 간판들.
그러던 이곳에 요즘 차량번호판을 가린 채 암행하려는 사람들 대신 강을 바라보며 조각과 그림을 감상하고 한담을 나누려는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남한강을 끼고 경기 광주시로 이어지는 양평군 강하면 일대 88번 국도변에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모텔, 식당, 성인용품점의 틈 속에서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갤러리 3곳, 복합문화체험관 3곳이 들어서있고 2곳의 갤러리가 곧 새로 문을 연다. 남한강변이 소리소문 없이 새로운 미술의 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양평군청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맑은물사랑미술관’, 의사가 자신의 소장품을 모아 만든 ‘닥터박 갤러리’(6월 개관 예정), 석재 사업가가 사재를 털어 만든 조각갤러리 ‘갤러리 아지오’, 미술가 부부가 작업장을 개조해 만든 갤러리형 카페 ‘몬티첼로’ 등 형태도 다양하고 개성도 강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로 시작하는 고려 고승 나옹선사의 시구를 새겨놓은 조각품이 손님을 반기는 갤러리 아지오는 80여점이나 되는 아프리카 토속미술인 쇼나조각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남한강이 굽어보이는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잡은 몬티첼로는 초입의 벚꽃나무숲과 강바람에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 소공원 형태의 둔덕 곳곳에 배치된 도예작품들이 어우러져 눈과 귀를 모두 즐겁게 한다.
최근 이들 갤러리들은 즉흥적인 클래식, 국악, 재즈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방문객들이 유리공예품이나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해 청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한 연령대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이곳이 새로운 예술의 거리로 떠오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에서 1시간 정도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다, 1990년대초부터 화가 조각가 도예인 시인 소설가 등 4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의 기반이 갖춰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조국희(31) 갤러리 아지오 기획실장은 "갤러리, 전시장, 문화공간은 모이면 모일수록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며 "공간부족 현상이 심각한 인사동이나 강남 화랑가의 대안으로 이곳에 갤러리를 마련하려는 서울 화랑 관계자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나아트센터, 표화랑 등 서울의 큰 화랑들도 이곳에 새로운 갤러리 부지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평군도 양근대교 일대 88번 국도변 8㎞ 구간을 2013년까지 ‘미술중심거리’ 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가로변 간판 정리와 함께 숙박업소의 업종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강하면 땅에 군이 건립비용을 대는 형식으로 미술관을 건립하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러브호텔촌이 미술의 거리로 변모하자 주민들도 환영일색이다. 김수기(45·양평군 강하면 전수리)씨는 "처음 도로를 따라 미술관이 들어선 5~6년 전만 해도 주민들은 ‘돈도 안되는데 미술관 건립이 무슨 짓이냐’는 반응을 보이며 시큰둥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빼어난 풍광과 예술작품을 결합시켜 이 일대를 문화벨트로 발전시킨다면 새로운 경제적 가치도 창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양평=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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