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낮은 완연한 봄이다. 슬슬 몸이 근질거린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하는 여행이 그립다. 어디로 갈까. 남도에는 본격적인 꽃잔치가 시작됐다는데…. 이왕 나선 걸음 가족과 함께라면 좋겠다. 물론 여행과 교육을 아우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이 있다. 경북 고령이다. 철기시대를 주도했고, 고령토로 불리는 토기문화를 중심지이다. 가야금의 대가 우륵의 고장이고, 초기 신라와 어깨를 견주던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대가야의 유적이 숨쉰다.
고령은 알려지지 않은 벚꽃 명소이기도 하다. 이달 말이면 천지가 벚꽃세상이다. 고령읍에서 후암리를 거쳐 가야산 입구까지 도로변이 20년 넘은 왕벚꽃으로 뒤덮인다. 길이만 10km이다. 벚꽃길이 끝나면 대가야 문화유적 답사코스가 시작된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4km가량 이어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트레킹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대가야의 역사가 머리에 쏙 들어온다.
대가야유적 산책로는 고령향교가 출발점이다. 마을앞 당간지주를 지나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시대 왕궁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야의 멸망 후 절이 지어졌다가 조선시대에 향교가 들어섰다. 탁 트인 시야가 누가 봐도 명당 자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고령역사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향교 옆으로 난 길목에는 일본의 역사날조흔적이 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세운 ‘대가야국성지(大伽倻國城址)’라는 비석이다. 고대일본이 대가야로 건너와 세웠다는 ‘임라일본부설’을 입증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지금 이 비석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돼있다.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최근 주민들이 같은 크기의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향교를 지나 산림욕장으로 향하는 길 옆은 대나무밭이다. 바람이 스쳐 사각사각 내는 소리가 운치있다. 오른쪽은 야생화단지이다. 금낭화, 패랭이꽃, 원추리, 비비추 등이 계절에 따라 피고 질 것이다.
곳곳에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 40분 남짓 걸어 주산성(사적 61호)에 도착했다. 주위로 망산성, 금산성, 울라산성, 예리산성, 노고산성과 가야산성이 둘러싸고 있다.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세운 성이다. 국사시간에서 조차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대가야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규모였음을 짐작케한다.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곳이 지산동고분군이다.
주산성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도착한다. 탁 트인 8부 능선 자락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덤이 빼곡하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것만 200개가 넘는다. 봉분이 무너져 무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많다. 능선에 들어선 무덤의 규모가 대체로 크다. 왕족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규모도 규모거니와 발굴에서 얻어낸 결과는 더욱 놀랍다. 3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일본 니혼마쓰야마고분의 금동관과 흡사하다. 백제나 중국계로 보이는 등잔도 발굴됐다. 내륙에 접한 조그만 도시국가가 아닌 대외무역까지 가능한 세력을 뻗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4호분은 왕권이 어느 정도였음을 가늠케한다. 왕이 죽으면 신하와 하인들도 함께 묻었다는 순장의 흔적이 이 곳에서 발견됐다. 이 곳에 매장된 순장자는 모두 36명. 국내 몇몇 무덤에서 순장자가 나왔지만 이만큼 규모가 큰 것은 전무후무하다. 철제무기, 금제귀걸이, 유리옥 등 많은 부장품이 나왔지만, 중요한 유물 상당수가 도굴 당한 것이 아쉽다. 고분군을 둘러본 뒤 내리막길 끝에서 만나는 대가야박물관에 44호분의 내부모습이 재현돼있다.
고분군을 가로지르는 26번 국도는 일제가 저지른 한민족 지맥끊기의 또 다른 흔적이다. 최근 고령군이 도로위로 산책길을 연결, 지맥을 이었다. 국도 건너편은 대규모 고분군을 본다는 것 보다는 산책의 느낌이 강한 코스이다. 좁게 난 소로를 따라 소나무가 도열했다. 솔잎이 뒤덮인 길이 주는 푹신푹신한 촉감이 좋다. 길바닥에는 부서진 토기조각이 흩어져 있다. 토기에 새겨진 무늬가 예사롭지 않다. 하찮은 돌이 아니라, 1,50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귀중한 유물이다. 새삼 길가의 풀 한 포기, 흙 한 줌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 땅에서 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산책로의 마지막 코스는 고분체험관이다. 삶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색다른 경험. 여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고령=글·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고령 여행 | 가는 길·볼거리-내달 2일 대가야 축제 개막… 딸기따기 체험 행사도
●고령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어디인지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동쪽으로 대구, 서쪽으로 경남 합천과 접하고 있다. 남쪽에는 경남 의령과 창녕, 북에는 경북 성주가 자리잡고 있다.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서대구IC에서 거친 뒤 88고속도로 고령IC에서 나온다. ●경북 고령군은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인 내달 2일부터 5일까지 대가야박물관일대에서 고령대가야체험축제를 개최한다. 관광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 특징. 대가야유적산책로에서는 해설이 있는 역사산책을 즐길 수 있다. 각 코스마다 대가야 전문가가 내는 퀴즈게임이 마련되고, 문제를 맞추면 푸짐한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 ●고령 양전동, 안화리 일대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암각화(사진)가 대거 발견되는 곳. 관광객의 얼굴에 암각화 문신을 새기고 암각화문양을 만드는 체험행사가 마련된 것도 이 때문. 미리 준비된 암각화 모형판에 탁본을 떠보는 체험도 있다. ●대가야 도자기와 가야금 만들기 체험에 참여해도 좋고, 철기시대문화중심지인 고령 야철지에서 야철을 운반하고 고르는 체험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대가야 탄생과 최후를 극화한 공연에 이어 가야금 경연대회 참가자의 합주로 마무리되는 대가야환타지도 볼거리이다. 박물관내 소장된 대가야의 다양한 유물을 야외에 전시되며, 음향과 특수조명을 이용한 대가야영상 멀티미디어쇼도 펼쳐진다. ●대가야고분 발굴과정을 체험하는 행사는 물론, 실물크기의 순장무덤모형에 누워보는 행사도 준비된다. ●한번에 너무 많은 역사공부를 하느라 지루해진다 싶으면 고령의 특산물 딸기 따기 체험에 참여하면 된다. 축제장 주차장에서 매일 3차례 딸기체험장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운행된다. 하루 720명씩 선착순 접수하며, 인터넷(http://fest.daegaya.net/)이나, 전화(054-950-6265)로 신청할 수 있다. (054)950-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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