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위기 극복과정에서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 및 투명성’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당위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투자부진, 성장잠재력의 약화, 일자리창출의 어려움, 불평등과 빈곤의 확대 등 현재 한국경제가 안고있는 문제의 많은 부분은 환란 때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 프로그램 탓"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진보세력도 동의한 이 프로그램의 결과, M&A 위험에 직면한 대주주들은 경영권 방어에 급급해 투자의욕 및 능력을 상실하고 금융기관을 사들인 외국자본들은 단기수익성에 몰두하며 기업금융을 외면함으로써 경제의 역동성이 현저히 저하됐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을 이끈 기업의 역할을 평가하며 "정경유착 등의 과거행실이 밉다고 재벌구조 자체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재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를 인정하고 주주 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에게 이로운 경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1990년 27세에 한국인 최초로 이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며 2003년 뮈르달상에 이어 올해 ‘빈곤국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역할과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세계적 권위의 레온티에프상까지 수상했다.
소액주주의 역할 강화를 통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운동을 줄기차게 펼쳐와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세계적 기업개혁운동가 5인’에 포함된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사촌관계인 장하준 교수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재벌의 지배구조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공정거래법 증권집단소송법 등의 후퇴에서 보듯 경제회생을 볼모로 한 재벌의 반 시장개혁적 요구가 거세지는 등 과거 회귀의 양상이 뚜렷하다는 인식에서다. "노무현 대통령, 정계 대표, 재벌 총수 등이 모여 투명사회협약을 맺었지만 대기업의 중소기업 약탈 실태를 고발하며 지배구조 선진화를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안철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는 요지의 언론 기고문은 그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두 사람의 상대적 입장차이 만큼이나 기업지배구조나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소유와 경영 분리, 이사회 중심 경영, 소유지배괴리도 축소 등이 경영 투명성을 높여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은 틀림없지만 무조건 몰아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엔 외국계 투기펀드들이 툭하면 지배구조를 무기로 우리나라 기업과 증시를 유린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겨가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소버린은 얼마전 SK㈜ 최태원 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재차 패하자 "불신임을 받는 지도력 아래 기업이 고사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극언을 퍼부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또 삼성전자는 주총에서 지배구조문제가 제기되자 "순이익 100억달러의 실적을 거둔 기업의 지배구조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라며 "문제는 기업지배구조가 아니라 NGO 등이 판치는 사회지배구조"라고 맞받아치는 일도 벌어졌다.
성장 패러다임이 바뀌면 물론 제도와 조직 운용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선진적 지배구조나 경영투명성 역시 경쟁력 강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잣대로 끊임없이 검증할 필요가 있다. 투명성이 때로 함정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투명성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사문제의 경직성 등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있는 후진성은 불투명성이 빚어낸 먹이사슬의 결과다.
이런 점에서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한국기업의 주식이 저평가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기업지배구조 때문이 아니라 안보위협, 정치불안, 소모적 노사관계 탓"이라는 보고서와 "소유·경영 분리의 영미식 지배구조가 글로벌 스탠다드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지금 같은 집단형 소유기업이 한국적 환경에 가장 적합하다"는 주장을 잇달아 내놓은 것은 볼썽사납다.
이유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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