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자" "동북아 중심국가를 만들자" "‘북핵 해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안보 전략으로 제시하는 굵직한 개념이자 목표다. 한국이 4대 강국의 이해가 부딪치는 동북아에서 평화를 이끌어내는 중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호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실제 우리의 균형자 역할이 커지기보다는 오히려 일본 등 주변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때문에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거창한 구호만 외칠 경우 주변국들과 갈등만 커지고 자칫 고립될 위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균형자론의 의미와 배경
노 대통령은 지난해까지는 ‘동북아 중심국가’ ‘동북아 경제중심’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으나 최근에는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2월 25일 취임 2주년 연설,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우리 군은 동북아의 균형자로서 이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22일 3사 졸업식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국가 차원의 균형자 역할을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100년 전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 됐을 때는 아무 역할도 못했으나 앞으로는 독립 변수 역할을 하면서 동북아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라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 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뜻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 현실성 논란
그러나 외교전략은 힘과 현실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성균관대 김태효 교수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인지,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그런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개념의 모호성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지렛대가 충분하지 않은데다 국력 등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원대한 외교적 이상론을 제시할 경우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고 비판했다.
경희대 정하용 교수는 "강대국 사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외교적 선언을 너무 자주 반복, 주변국들과 갈등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외교에서는 완전 중립은 어렵고 결국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경우가 발생하므로 좀더 신중하게 전략을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장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 균형자 개념과 달리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힘을 키운다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런 선언은 일본의 패권주의 흐름을 제어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 요동치는 동북아 구도/ 맹주 도약하는 中을 美·日이 포위 시도
동북아시아 구도가 요동치고 있다. 북핵, 한미동맹 조정, 미중간 패권 다툼, 중일간 영토분쟁, 한일간 갈등 등 불안정 요인들이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내 과거사 분쟁이 기름을 끼얹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동북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어 슬기로운 전략적 선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동북아의 불안정한 기류는 강대국간 패권 다툼이라는 구조적 요인에다 각국의 민족주의, 복잡한 국내사정 등의 하위 변수들이 얽히면서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불안정성의 기본 구도는 맹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 이를 포위해 억제하려는 미국, 미국에 가세한 일본, 정면 반발하는 중국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미일이 지난달 대만해협 분쟁 때 공동 대처키로 합의하자 중국이 즉각 대만 침공 가능성을 열어놓는 ‘반국가분열법’ 제정으로 맞선 것이 현 기류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이에 더해 동북아 3국에서는 지역 내 지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민족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중일간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과 동지나해 대륙붕개발 갈등은 양측의 팽창주의가 맞붙은 대표적 사례다. 독도 영유권을 강변하고 보통국가로 변신하려는 일본의 야심, 과거사 직시를 요구하는 한국의 분노, 고구려사 왜곡마저 서슴지 않는 팽창적 중화주의 등은 갈등구조를 중층화하고 있다.
갈등 구조의 꼭지점에서는 북한 핵 문제가 내연하고 있다. 미국은 인내심의 한계를 언급하고 있으며, 일본은 올 6월이 한계상황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있다. 북한은 미국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할지를 고민중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선택 반경은 그리 넓지 않다. 우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놓고 미국과의 신경전이 불가피해 보인다. 북핵 문제에서도 우리 정부와 미 강경파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우방들과 껄끄러워지면서 우리가 가졌던 지렛대가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형국이다.
한태규 외교안보연구원장은 "동북아에서 기존 질서가 깨지고 새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며 "이럴 때 일수록 한미동맹, 한일공조를 굳건히 유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동북아 주체들이 서로를 강한 경쟁 상대로 인식하는 와중이어서 우리도 우리 몫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국력에 걸맞은 발언권 행사를 전제로 한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금 분명한 점은 우리가 친구를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키워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전문가들 균형자論 의견/ "아직 힘 못갖춰…"
우리나라가 동북아시아의 균형자(Balancer)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데 대해 대다수 전문가들은 "현 상황에서 우리 군은 아직은 균형자 역할을 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서 "통일 이후에나 모색할 노선을 구호처럼 외치면 국가이익이 도리어 훼손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는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면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양쪽에게 러브콜을 받을 정도의 전략적 매력이 있거나,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처럼 군사·정치적인 세력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도 "듣기에는 시원하나 한국이 어느 쪽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다른 쪽이 결정적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균형자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19세기 영국의 외교노선 등을 예로 들며, 군사적 균형자는 ▦분쟁의 결과를 좌우할 만한 힘 ▦군사 동맹으로부터의 자유 ▦지리적 경제적 독립성 등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균형자로서의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한미동맹 한일동맹을 훼손하는 전략 및 행동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이근 서울대 교수는 "중국이 강대해지고 있지만, 미국의 군비는 중국을 포함해 2~14위 국가의 군비를 합친 것보다 강하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균형자의 역할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더욱이 "미국 중심의 네트워크를 탈피해서 얻을 정치적 경제적 이익도 없는데 균형자 노선을 취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군사동맹이 국제법적으로도 균형자 노선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이근 교수는 "균형자 개념은 군사문제를 중시한 구 시대적 발상"이라며 "이미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사안별로 유연한 동맹관계가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균형자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는 노 대통령 발언에 대해 "탈냉전 시대 우리 군의 역할과 군사전략 개념을 재정립하자는 정치외교적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할 우리의 의지만 있다면 동북아 균형자 역할은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미동맹체제에 구속된 상태에서 군사 운용을 하면 향후 중국과 미국의 패권 다툼에 휘말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자간 협력체제를 병행하는 유연한 동맹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현정기자 agada20@hk.co.kr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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