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화창한 날씨다. 휴일마다 해온 산행을 하루 접고 집안청소를 하고 나니 뭔가 빠진 듯 허전함이 밀려왔다. 거실과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인 화초들이 예사롭지 않다. 봄이 왔으니 자기들도 봄기운을 쐬고 싶다는 눈치다. 그렇잖아도 분 갈이를 할 때가 되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라 이왕 내친김에 밀린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시내에 나가 분 갈이용 흙과 화분 몇 개를 구해왔다.
베란다 가득히 굳어진 화분들을 죄다 부어놓고 보니 비좁은 화분 안에서 잔뿌리를 얼마나 키워왔던지 말 못하는 화초들의 그간의 고통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물로 받아둔 난초의 뿌리는 어찌나 길게 뻗었는지 화분위로 삐져 나와 마치 줄기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근 보름동안 난향에 젖어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했던 덕에 제일 먼저 손을 보기로 했다. 근사한 화분 두개에 나누어 분가를 시키고 새로 사온 알맹이 흙을 가득 넣어 뽀송뽀송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저기서 얻어온 춘란도 화사하게 갈아주고 아직 이름조차 파악하지 못한 서너 그루 꽃나무와 선인장도 깔끔한 화분에 옮겨 심었다.
잎과 줄기가 온방을 휘감았던 스킨다비스, 붉은 영산홍은 두어 달 새 흙의 기운이 쇠퇴한 탓인지 시들해지고 색깔도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지라 거름을 보태서 물 빠짐이 좋은 화분으로 단장을 해 주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화초들을 아기 목욕시키듯 정성 들여 씻겨 화분 대에 진열해 놓고 그 중 막 꽃대가 맺힌 난과 알뿌리 화초는 거실로 들여 놓았다.
초롱초롱 제 빛깔을 내며 새로 들어선 화분 속에서 자태를 뽐내고있는 화초들을 보니 마치 곱게 머리 빗어 넘긴 새색시 같은 게 집안 가득 봄 내음이 넘쳐 났다. 귀찮게만 느껴졌던 분 갈이를 손에 흙 묻혀가며 갈무리하고 나니 내가 봄의 주인이 된 것 같아 행복해진다. 내 삶의 공간도 한결 청아해졌다. 머잖아 화사하게 꽃을 피울 때 그 향기에 취해 은은한 여유 속에 또 한 번 행복해지겠지. 이용호·경남 사천시 선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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