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지능은 어머니를 닮는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다. 똑똑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가 공부를 더 잘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머니를 보고 배우며 자란 까닭일까. 아니면 지적 능력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서 전해지는, 일종의 유전이기 때문일까.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과학 철학 문학 등 많은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졌다. 때로는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미국 하버드대 총장은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여성 최우수 학생이 적은 것은 선천적 이유일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학계의 비난을 샀고, 결국 낙마 위기에 몰렸다. 남녀의 심리 차이를 분석한 한 베스트셀러는 "남성은 화성, 여성은 금성에서 왔다고 여겨질 정도로 정신세계가 심각하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 美·英 등 연구팀 ‘X염색체 DNA 서열’ 분석
‘유전자의 시대’ 21세기를 맞아 남녀 차이에 관한 많은 ‘물음표’에 답을 주기 위해 생명 과학자들이 나섰다. 영국에서 발행하는 과학저널 네이처 17일자는 영국 웰컴 트러스트 세인저 연구소 엘리자베스 소더란 박사팀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다국적 과학자들이 참여한 국제협력 연구결과를 표지 논문으로 실었다.
‘인간 X염색체의 DNA 서열’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유전자 차원에서 남녀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23개의 염색체를 갖고 있으며, 이 중 1~22번의 ‘보통 염색체’는 크기와 모양이 같은 것끼리 짝을 이뤄 유전 정보를 활발히 공유한다.
그러나 23번째 염색체(성 염색체)는 독특하다. 여성의 경우 다른 염색체와 같이 동일한 한 쌍이 존재하지만, 남성은 크기가 훨씬 작고 구조가 완전히 다른 염색체와 쌍을 이룬다. 이 염색체는 과학자들에 의해 ‘의미를 모르겠다’는 뜻의 X염색체로 불리기 시작했다. 남성만 갖고 있는 ‘또 다른 한 쪽’은 이와 상응하는 Y염색체로 일컬어진다.
이번 연구는 X염색체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것이다. Y염색체의 염기서열은 이미 밝혀졌으나, 성 결정 외에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남녀 차이의 열쇠가 X염색체에 들어있는 것이다. 연구팀은 사람의 DNA를 관찰하기 쉽도록 잘게 잘라 대장균에 증식한 후 X염색체의 유전자를 갖는 DNA 조각들만 골라 분석했다. 연구팀은 우선 이 조각들을 Y염색체의 염기서열과 비교했다. 그 결과 X, Y염색체의 크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패턴을 지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이 본래 동일한 염색체였다는 이전의 가설을 확인해준 셈이다.
이 같은 가설은 미국 화이트헤드 연구소 데이비드 페이지 박사팀이 1999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당시 X, Y염색체 유전자 염기서열의 유사성을 계산했던 페이지 박사는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두 염색체는 2억4,000만~3억2,000만년 전에 갈라졌고, Y염색체는 네 차례에 걸쳐 크기가 계속 쪼그라들었다"고 주장했다.
남성보다 많은 양의 유전자를 갖게 된 여성의 23번 염색체는 남성과 유전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쪽이 활동을 중단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두 개가 존재하지만 한 개만 일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소더란 박사은 이 같은 ‘불활성화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40명의 여성에게서 피부세포를 채취해 분석했다.
얼마나 많은 X염색체가 불활성화하고, 활성-불활성화한 유전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 결과 약 75%의 유전자는 양쪽 모두 활성화하지 않아 인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15%는 양쪽 모두가 활성화해 남성보다 양이 두 배나 많았다. 나머지 10%는 경우에 따라 활동하기도 했고 침묵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이 10%의 독특한 유전자가 남녀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염색체는 한 쪽이 고장 나면 그 동안 조용히 있던 다른 한 쪽이 망가진 유전자를 대신해 일한다. 물론 두 개가 존재하는 여성에 한해서다.
남성의 경우 손상된 유전자의 역할을 대신해줄 ‘예비 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유전자 손상은 그대로 질병으로 이어진다. 혈우병 근이영양증 색소성망막염 등 아들에게만 유전되는 희귀병의 비밀이 이 독특한 10%의 유전자에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지적 능력이나 심리적 불균형, 목소리나 취향 등 생식 기능과는 관계 없는 남녀 간의 무수한 차이를 규명할 열쇠도 X염색체가 쥐고 있을 것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판단이다.
X염색체의 염기서열이 밝혀지면 많은 병의 발생 및 치료경과 등에 남녀차가 뚜렷한 이유도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도움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염영일 박사
■ X염색체가 러 왕조 몰락 불렀다고?/ 러 황제와 결혼 英공주 아들에 혈우병 물려줘
X염색체를 처음 찾아낸 과학자는 독일의 헤르만 헨킹이다. 그는 1891년 ‘별박이노린재’라는 곤충의 정모세포 분열을 연구 하던 중 특이한 행동을 하는 염색체를 발견하고 이를 X염색체, 크기가 다른 한쪽을 Y염색체라 이름했다. 인간과 달리, 새처럼 수컷 염색체가 같고 암컷 염색체가 다르면 X, Y 대신 W, Z를 쓴다. 이 경우 수컷은 Z-Z, 암컷은 Z-W를 갖는 셈이다.
호랑이나 점박이고양이처럼 털 색상이 다채로운 동물의 줄무늬, 점박이 등은 X염색체의 불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암컷의 경우 어린 시절 한 쌍을 지녔던 X염색체 중 어떤 것이 불활성화 하느냐에 따라 자라면서 털의 색상 모양 패턴 등이 달라진다. 수컷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털을 평생 유지한다.
인간 세상에서 X염색체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예는 18세기 유럽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유전자 속에 지니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혈우병은 여왕에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아들 레오폴드는 사망에 이르게 했다. 레오폴드는 두 딸 앨리스와 베아트리체를 낳았는데, 이들 역시 멀쩡했다.
앨리스의 딸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제국 니콜라스 황제와 결혼해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는데 그 역시 혈우병 환자였다. 러시아 황실은 ‘치유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방종한 수도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이는 러시아 제국의 약화-황제 퇴위-제국 몰락으로 이어졌다. 학자들은 만약 혈우병과 X염색체의 관계가 규명돼 러시아 황실이 앨리스를 황후로 맞지 않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김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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