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마네(島根)현의 ‘다케시마의 날’조례 제정과 일본 후소샤(扶桑社) 교과서의 역사 왜곡 등으로 한일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1998년 이후 견지해온 미래지향적 대일 외교를 사실상 폐기하고 대일 과거사의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리겠다는 대일 신독트린을 발표했다. 한국일보는 15일 대일 관계를 슬기롭게 헤쳐가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주 일본 대사를 역임한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과 최상용 고려대 교수의 대담을 마련했다.
공로명=정부가 최근 악화하고 있는 한일 관계 속에서 대일 신독트린을 발표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일종의 대일 정책을 재조명하는 가이드 라인을 발표한 셈인데, 격화하고 있는 국민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냉정한 접근을 하겠다는 정부 자세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잘 된 가이드 라인이라 본다. 과거문제는 과거 문제대로 직시하면서 미래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전체적으로 잘 대응했다.
최상용= 한일관계가 참 어렵다. 쉽게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우선 장애물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한중일 동북아 3국이 세계 GDP의 20%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외교안보 레벨의 지역협력체가 없다. 가까운 장래에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소위 보통국가론을 내세우는 일본 움직임을 보면 더욱 그렇다. 보통 국가라는 것이 정치 경제 군사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데, 일본의 노선이 과연 동북아 평화, 지역 협력체 형성에 도움이 될지 염려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우호를 유지하는 것은 두 나라 정부의 숙명적인 과제이다.
공= 국민들의 감정이 상당히 격앙돼 있어 문제다.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정부가 용기 있게 국민들에게 털어놓고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시마네현 조례가 마치 독도 영유권에 손상을 가져오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국민 감정이 격앙돼 있지만, 법률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또 그 동안 국민 여론이 독도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가 너무나 소극적이다, 일본의 항의를 두려워해서 우리 권리를 제대로 주장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국민 분노가 커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소극적으로 비쳤던 것은 정부가 독도 문제를 한일 관계 차원에서 관리하다 보니까 그런 것이다. 영토 분쟁에 대한 역사를 보면 국민 감정이 민족주의와 직접적으로 결합해서 폭주하는 경향이 있다. 비근한 예가 포클랜드 전쟁이다.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이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최= 이번에 보면 독도 문제를 교과서 문제와 같이 취급하는데, 둘 다 일본의 식민지화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잘 관리하고 대응하기 위해서 두 문제를 분리해서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선 독도 같은 영토 문제는 제로섬 게임이다. TV를 보면 앵커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분개하지만, 일본에서는 거의 전 국민이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생각한다. 독도 문제에는 일본안에서 극소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우군을 찾기 어렵다. 격렬하게 대립하면 할수록 이분법이 강해지고, 한일 내셔널리즘간의 갈등이 커진다.
하지만, 교과서 문제는 조금 다르다. 역사 문제가 사실과 다른 것일 경우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과정에서 일본 내 우군도 생긴다. 지난번 역사교과서 채택률이 0.039%였다. 일본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제로 보다 더 설득력있는 채택율이다. 우리의 주장에 대해 평균적으로 많은 일본 국민들이 이해했다는 것이다.
공= 독도 문제와 관련해 귀중한 우군도 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응할수록 우리를 이해하는 일본 지식인이 많이 나온다. 지난해 특히 현저하게 일어난 한류붐과도 영향이 있다. 학자 중 일본 주장이 옳지 않다고 귀중한 학문적 공헌을 하신 분도 계시다. 이런 분들이 글을 쓰려고 해도, 대학에서 압력을 넣고 우익이 전화걸고 협박한다. 그럼에도 학자적 양심에서 소신을 펴는 분이 있다. 일례로 호리 가즈오(堀和生) 일본 교토대 교수는 이미 1987년 ‘조선사연구회논문집’에서 독도에 관한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1877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네 현으로 편입하겠다는 데 대해 이 것은 한국땅이라고 판시해줬다는 기록을 찾아내 논문에 발표했다. 일본 스스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최= 공대사 말처럼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우리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영토 문제는 쉽지 않다. 교과서 문제와 함께 얼버무려 다루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공= 정부가 목소리를 낮춰왔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키웠다는 일각의 지적은 아쉽다. 한 측면만 본 것인데, 오히려 떠들었을 때 부작용이 생긴다. 특히 영토 문제는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며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폭주하는 특징이 있다. 또 떠든다 해서 일본이 양보를 하겠는가.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평화적인 길 밖에 없다. 19세기 이전과 같이 무력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화적 해결하는데, 첫째가 외교 교섭이다.
최=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일찍부터 공개적으로 국민들에게 설명했어야 했다. 대내 홍보가 부족했고 대외 홍보는 더욱 더 부족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우리 스스로 너무 당연시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만큼 조직적으로 홍보했는가. 차제에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공=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해야한다는 주장은 매우 잘못됐다. 한일 어업협정과 독도영유권의 전혀 별개의 문제다. 국제 사법재판소의 유명한 판례가 있다. 프랑스와 영국이 도버해협에 있는 망끼에라는 섬을 두고 분쟁이 있었는데, 프랑스가 이 섬에서 오랫동안 어업을 해왔기 때문에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지만, 사법재판소는 어업권과 영유권은 별개라고 판결했다.
최=최근 한일관계의 악화로 한일 자유무역협정 (FTA) 체결도 더 미뤄질 것 같다. 한일 FTA는 단순히 경제적 협력 의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두 나라간의 협력이다. FTA 체결을 위해 환경조성이 중요한데, 최근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일본은 FTA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 정말 고난도의 계산을 하고 덤벼들어야 하는데, 이 문제로 지체돼 걱정이다.
공=아세안과의 FTA도 중국이 요청하자, 일본이 ‘앗 뜨거’ 하며 뒤늦게 달려들었고, 우리도 아세안과의 FTA에 뛰어들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이다. 미국과의 FTA도 중요하다. 여러 측면에서 빨리 해야 하는데, 미국과는 지금 스크린쿼터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고, 일본과는 독도 문제가 걸려 버렸다.
최=1998년 한일파트너십 선언을 보면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원래 95년 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 총리 담화문에도 식민통치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란 표현이 담겨있는데, 당시 주체와 객체가 애매했다가 98년에는 일본과 한국이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사실 이 정도면 상당한 반성의 표시다. 이 이상을 일본의 현실에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98년 이후 일본의 행동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일부 장관 등의 발언을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르게 보여진다.
공=이런 때일수록 서로 만나서 솔직한 의견을 교환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기에서 합의될 수 있는 것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일년에 두 번하기로 한 한일 정상회담의 경우에도 연기하지말고 했으면 한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냉각기간을 가진 뒤에 두 정상이 서로 만나서 풀 것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최근 일각에서 주일대사 소환 얘기가 나왔는데, 대사소환은 그럴만한 명분이 있고 우리의 기대가 예견될 경우에 한해야 한다. 4년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당시 제가 엄무협의차 9일간 귀국했지만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공=사태 이렇게 된 이상 조금 시간 두고 냉정하게 대응하는 게 좋다. 벌겋게 달아오른 데 물 끼얹어 봐야 안 꺼진다. 냉각기간을 봐가면서 관리해가야 한다.
최=한일 관계에 있어 장애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건 상수(常數)다. 언제나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일관계에 어떤 난관이 와도 합리적으로 교섭해 나가면 극복할 수 있다는 조심스런 낙관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그만큼 양국 국민들이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우선 4년전 역사 교과서로 온통 야단 법석이 났었지만, 일본내 채택률은 0.039%에 불과했다. 그것이 교과서 분쟁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반응이었다. 일본 국민의 양식을 믿고 싶다. 둘째로 욘사마 열풍에 표출된 평균적인 조용한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이다. 일본에 우도 있고 좌 있지만, 조리 있게 설명하면 설득될 수 있는 세력이 산재해 있다. 교과서 문제에서 한국에 동정적인 일본의 제1야당대표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공언하고 있는 시점에 아직도 고이즈미총리가 독도발언을 자제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정리=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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