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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파트와 간판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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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파트와 간판의 세상

입력
200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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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인들과 겨울 끝 자락의 설악산에 다녀왔다. 눈이 늦도록 많이 온 설악산 천불동 계곡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등산객들을 품어 주었다. 수북이 쌓인 눈이 천지를 뒤덮고, 아래로 눈 녹은 물이 넉넉하게 흘러 내리는 정경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너머로 펼쳐지는 설악의 실루엣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정든 연인과 작별하는 듯 아쉬웠다.

그러나 잠시 뒤 이러한 감정은 분노와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수려한 경관을 비웃듯 오만하게 솟은 아파트들이 계속 나타나고, 길가에는 비정상적인 크기와 미적 감각의 부재를 대담하게 과시하는 식당과 모텔 간판이 아귀다툼 하듯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주택용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아파트가 한가한 시골 마을에 불쑥 불쑥 솟아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이 향상된 생활수준, 도회적 생활환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우리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택용지의 수급과는 무관하게 어디든 짓기만 하면 구입자가 충분히 있어 개발자로서는 남는 장사가 되리라는 사회 경제적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구매자 입장에서는 아파트가 자행하는 폭력적인 환경파괴 행위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더 안락한 주거환경을 손쉽게 누릴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일차적 고려 대상일 것이다. 아름다운 산천을 가꾸고 보존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누리는 이익은 어느 특정한 가계의 이익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공공의 이익이다.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은 채 아파트를 지어 팔고, 이를 구입해 안락함을 누리는 행위는 특정한 기업이나 해당 가계의 사적인 이익에 직접 보탬이 되는 행위다.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부분은 이처럼 사익추구가 공익증진과 양립하기 어려운 분야가 아닐까.

환경과 주변 경관에 대한 아무런 배려 없이 오로지 크기와 엽기성으로 경쟁하는 간판의 난립 역시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업주로서는 자신의 고객이 대부분 빠르게 이동하는 이들임을 고려, 오로지 크게 한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을 주문할 것이다. 간판제작자가 미적 감각을 거론하며 주문자에게 난색을 표명할 경제적 이유는 없다.

또 우리는 식당이나 숙박업소 안내 책자를 사전에 꼼꼼히 들여다보고 미리 정해 찾아가는 소비행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업주로선 간판에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크고 자극적인 간판은 사실 모두가 작고 다소곳한 간판이 있는 경우와 그 결과에 있어서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개개의 업주를 설득할 수 없다. 후자의 상황은 모두가 이 게임의 룰을 준수할 때에만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축허가를 불허하고, 미적 감각이 세련되지 못하고 크기나 색상 등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간판을 규제하는 정책을 도입함에 있어서 예상할 수 있는 저항은 사유재산권에 근거한 것이다. 내 땅에 내가 원하는 건물을 짓고, 내 건물에 내가 원하는 간판을 내 걸 수 있도록 하라는 주장은 재산권 행사의 공공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천박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19세기적인 사소유권 절대의 이데올로기를 현대사법의 지도원리인양 오해하는 논자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듯하다.

소유자라는 이유로 누리는 이익도 결국은 국가와 공동체가 비용을 부담해 유지하는 사법자원의 조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재산권 행사에 대한 공익상의 제약을 받아들여야 함은 당연하다. 하긴 도시인들이 일년에 몇 번 지날 때 보기 좋으라고 그곳 사람들이 안락한 주거환경을 누릴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가 하는 좀 더 미묘한 문제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아파트만이 안락한 주거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잘못된 것은 아닐까?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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