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거대한 뿌리’(1974, 민음사)는 김수영(1921~1968)이 작고한 뒤 맨 처음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이다. 그가 생전에 낸 시집은 ‘달나라의 장난’(1959, 춘조사)이 유일하다. 합동시집들은 있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 도시문화사)’ ‘평화에의 증언’(1957, 삼중당) ‘한국전후문제시집’(1961, 신구문화사) ‘52인 시집’(1967, 신구문화사) 따위가 그렇다. 타계하고 6년 뒤에 나온 시선집 ‘거대한 뿌리’ 이후 또 다른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 민음사)와 ‘김수영 시선’(1981, 지식산업사)이 나왔고, 1981년 9월 마침내 그 때까지 수습된 김수영 시 전체가 ‘김수영 전집1’(민음사)에 모였다. 시 전집이 나온 뒤에도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 열음사)와 ‘사랑의 변주곡’(1988, 창작과비평사) 같은 선집이 나온 바 있다. 그러니까 시인의 생전이든 사후든, 공동시집이나 시선집이나 전집이 아닌 통상적 의미의 김수영 시집은 ‘달나라의 장난’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발걸음을 ‘달나라의 장난’이 아니라 ‘거대한 뿌리’로 내딛는 것은 이 시선집이 김수영의 시세계를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0년의 4·19혁명일 터인데, ‘달나라의 장난’은 아쉽게도 그 한 해 전에 나왔다. 그래서 그 유일한 시집에는 혁명에 매료되고 반혁명에 좌절하는 사회참여적 지식인 예술가로서의 김수영의 면모가 (적어도 또렷하게는) 드러나 있지 않다. 한국 민주주의가 새롭게 기지개를 펼 즈음 출간된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은 김수영의 그런 사회참여적 지식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특히 중시하고 이를 계승 심화하려한 ‘창비’ 진영의 리더 백낙청이 엮은 것으로, 그 표본 가치는 ‘거대한 뿌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변주곡’이 출간된 것은 김수영의 그림자가 한국문단에 유파를 가로질러 깊이 드리워진 뒤의 일이다. 반면에 ‘거대한 뿌리’는 한국 문학장(文學場)에서 김수영이라는 이름이 권력화의 길로 들어서는 한 계기가 된 시집이다.
‘김수영 전집1’ 개정판(2003)에는 모두 176편의 시가 실려있다. 스물세 해 시작 활동의 소산으로는 다작이랄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나온 김수영론이 수백 편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들이 문단 안팎에서 그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뜻이겠다. ‘거대한 뿌리’의 편자는 그 가운데 65편을 추렸다. 맨 앞에 실린 작품은 김수영 자신이 "사화집에 수록하기 위해 급작스럽게 조제남조(粗製濫造)한 히야까시 같은 작품"(수필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이라고 자조적으로 회고한 바 있는 ‘공자(孔子)의 생활난’이다. 1945년에 발표한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은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인 바, 이 대목은, 제목에 보이는 ‘공자’와 관련해, 논어 ‘이인(里仁)’편에 기록된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공자의 말에 시의 옷을 입힌 것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이 해석의 적실성을 떠나, 이 구절들이 늘 깨어있는 상태로 세상을 투시하겠다는 젊은 시인의 다짐인 것은 확실하다. 이 각성의 다짐은 그보다 11년 뒤 발표된 ‘눈’에서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라는 인상적 표현을 얻는다.
시집 ‘거대한 뿌리’의 맨 끝에 수록된 작품은 그 유명한 ‘풀’이다. ‘풀’은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로 시작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로 끝나는 이 시는 그 열쇠말 ‘풀’의 원관념이 무엇인가를 두고 시끌벅적한 논란을 낳은 바 있다. 죽은 시인이 다시 살아나기 전에야 그 논란을 깔끔히 매듭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류 해석에 따라 이 작품의 ‘풀’을 민중의 은유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풀’을 순수한 서경시로 읽는다고 해서 이 작품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풀’의 경쾌한 리듬감이 김수영 시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 확인하면 족하다.
4·19 직전에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당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하..... 그림자가 없다’)고 싸움의 일상성을 선언한 김수영은 짧은 혁명과 긴 반혁명을 살아내며 당대의 가장 날카로운 정치의식을 시 속에 투영시켰다. 그 정치의식의 핵심은 반성이었다. 민주당 정권 시절에 이미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그 방을 생각하며’)이라고 자신을 일깨운 그는,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시’)라고 털어놓게 한 5·16 군사반란 뒤 반혁명의 세월 속에서 소시민적 일상에 침잠한 자신을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고 힐난한다. 반성이 실천을 대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점을 들어 김수영의 이런 ‘습관성’ 반성을 일종의 ‘알리바이 만들기’로 깎아 내리는 입들도 있지만, 정직의 다른 이름인 그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서 시인이 당대 미학적 정치적 인식의 첨단을 감당할 대자(對自)에 다다른 것도 사실이다.
비평가 김현은 ‘거대한 뿌리’의 해설을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뒤의 관찰자들은 김수영의 또 다른 시적 주제로 사랑을 덧붙였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정치적 의미의 사랑이다. 기실 김수영에게 사랑은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라는 인식을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인식으로 바꿀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지난해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황인숙은 수상 소감에서 "김수영의 삶과 문학 속에서 사랑이라는 왼손과 자유라는 오른손은 신명나는 박장(拍掌)을 이루지 못하고 더러 따로 놀았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김수영 시학의 미완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자유와 사랑의 지양이 모든 문학적 사회철학적 탐구의 다다르지 못할 이상태(理想態)로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는 의지로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라고 전망할 줄 알았던 시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수영의 내면에서 자유와 사랑의 거리는 최소한으로 좁혀져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거대한 뿌리’는 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를 대면하며 실천할 수 있는 정직의 한 극단을 보여주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던 김수영은 그 정직성으로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 한국문학사’) 노릇을 하며 한국현대문학의 매력적인 이름이 되었다. 정직은 그의 삶과 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그는 시가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아니 정직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시가 노릿한 화장을 거부하고 비시적(非詩的) 일상어로 버무려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김수영이 옳았다. 오늘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어떤 종류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아름다움이 진정 새로웠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설령 그가 모더니즘이라는 말에 시큰둥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모더니스트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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