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적에 옛날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집안어른들은 물론 이웃의 어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었다. 있는 밑천 없는 밑천 다 털린 어른들은 급기야 나를 보면 "저 옛날얘기 빚쟁이 온다"며 피하는 시늉까지 하였다. 옛날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살게 된다고 겁도 주었다. 그 때는 친척들이 많이 왕래하던 시절이라 집에는 새로운 손님이 끊임없이 왔기 때문에 나의 옛날얘기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그들의 얘기 중에는 겹치는 것도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역사이야기였고 대부분 조선후기의 야담이었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었다. 역사와 문학이 사촌쯤이라는 생각은 이 때부터 갖게 된 것 같다.
어른들의 옛날이야기, 특히 귀신이야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할 즈음 글을 깨치자 무엇보다 책이 좋았다. 책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였다. 책은 늘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자 친구였다.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끊임없이 묻기를 그치지 않던 아이에게 글을 깨치고 나서의 책읽기는 갈증의 해소이자 즐거움 그 자체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암흑 같았던 시절에 책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손에 닿는 것은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잡식성 남독이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천막 이동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읽기에 골몰하던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인생의 목표를 어렴풋이나마 공부하는 쪽으로 정했던 것 같다. 결국 책 읽기가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지리 선생님이 "이완용은 애국자다"라고 일갈하며 느닷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때렸다. 너무나 놀라 어안이 벙벙한 우리들에게 "만약 이완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으로 그나마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서양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고 부연설명을 하셨다. 선생님의 주장은 분명히 틀린 것 같았지만 반격할 능력이 없던 내게 큰 충격이었다. 역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일차적 계기였다.
문·사·철을 놓고 고민하던 대학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역사를 선택하였지만, 식민사학의 그늘과 실증사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60년대 역사학은 실망스러웠다. 재미도 없었고 의식이 고양되는 기쁨도 없었다. 의미 부여도 못하고 고증에만 매달려 사실의 나열에 급급한 역사학에 회의가 들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책 속에 파묻혀 2년 여가 지나고 3학년이 되자 국사, 동양사, 서양사중에서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주저없이 국사를 선택했다. 우리 역사부터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이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잘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식민사학으로 왜곡되어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실타래를 솔솔 풀어가는 작업은 항상 뿌듯한 충만감을 안겨주었으므로$.
대학졸업논문은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1881년 일본의 개화실상을 시찰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된 속칭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군사정부는 근대화를 지상과제로 내세웠고 학계에도 근대화담론이 무성하였다. 내가 그 논문을 쓰게 된 것은 근대화담론 속 개화정책의 일환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지만, 많은 관련 자료가 사장되어 있는 것을 발굴해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어서였다.
논문을 쓰기 위해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서울대 중앙도서관 고도서 열람실에 들락거렸다. 이 작은 방이 바로 규장각의 전신이었다. 대학원생과 교수들만 사용하던 이곳에 학부생이 혼자 앉아 있자니 따가운 눈총도 감수해야 했다. 한창 논문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휴교령이 내렸다.
교수나 대학원생은 출입증을 받아 연구실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며 날마다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그러한 내 모습이 군 부대장의 눈에 띄었는지 어느 날 나를 불러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어서 괴롭다고 대답했다. 한참 생각하던 그는 내게 출입증을 끊어주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야말로 논문에 전념하였다. 강의도 없고 영화 보러 가자는 친구도 없어서 눈만 뜨면 도서관에 가서 자료 뽑고 정리하여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이 때 논문 쓰기에 푹 빠져본 경험은 훗날 다시 공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괴롭고도 감미로운 체험이었다. 꼭 필요한 자료를 찾지 못해 몇 날 며칠을 자료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드디어 찾아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엉성했던 논문의 구성이 각고 끝에 틀이 잡히고 술술 써지자 환희가 휘몰아쳤다. 논문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아이를 낳은 것 같다고들 했는데 뒤에 경험해 보니 비슷한 감정이었다. 드디어 지도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역사학보’에 실렸을 때는 정말 가슴이 뿌듯하였다.
그러나 대학 졸업과 함께 연구소 비슷한 곳에서 잠시 일하다가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 후 십여 년 간 아이들 키우며 그야말로 철저한 생활인으로 된장 고추장까지 담그며 살았다. 이 기간은 고된 가사노동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맞은 휴식의 계절이기도 했다. 학자로서 동면기였다고 할까? 정신적 긴장감 없이 사는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물같이 속절없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만학도가 되었다. 십 년 동안 신문 한 장 제대로 읽을 새 없이 살아온 삭막한 생활 끝에 손에 든 책은 보석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듯이 공부에 빠져들면서 열정이 맑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오직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능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또 하나의 인생역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수가 되었지만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를 더욱 다졌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입장에서 ‘공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라는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역사공부를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판단기준을 분명히 하며 균형감각을 익히게 될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예측도 일정부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가르쳤다.
전공시기도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예부흥기라 할 18세기로 소급하였고 조선후기로 확대하였다. 분야도 사상사, 지성사, 문학사, 문화사 등 상부구조 연구로 갔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 규장각에 소장된 문집을 비롯한 수많은 고도서를 섭렵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대왕 이래 자료의 보고였다. 규장각을 모태로 하여 성장한 나의 공부는 규장각 관장(1999년~2003년)으로 봉사하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혼란은 서세동점에 편승했던 일제 35년의 강압통치와 6·25전쟁의 후유증 극복 과정이라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제국주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전환기라 생각한다. 이는 조선후기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여 조선사회를 재건하던 역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조선이 끝내는 문화중심국으로 우뚝 서서 문예부흥을 이룩해 낸 사실을 전범으로 삼기 위하여 그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아울러 19세기이후 전쟁사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평화사관으로 복권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으며 민족 정체성을 세우는 길이다. 나아가 21세기 세계질서 재편기에 철지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국가로 거듭나는 단초를 여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남을 침략하거나 약탈하는 존재를 오랑캐라 불렀다. 우리나라는 오랑캐 짓을 한 전력이 없기 때문에 평화공존 논리를 개발하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 명분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문화 전통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 정옥자 교수는
1942년 5월 24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온 뒤 살림을 하다가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9년부터 4년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규장각 관장을 지냈다. 그는 한국의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정조시대를 깊이 연구하여 한국사회가 어떻게 하면 성숙한 문화국가가 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문화운동사’ ‘조선 후기 문학사상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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