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다 공원이라 불리던 탑골 공원, 그리고 그 앞의 파고다 학원으로 대표되는 종로 3가 영어학원가. 둘 모두 상징성이 강한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이 ‘파고다’라는 이름을 공유하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두 공간은 하나로 섞이지 못하고 따로 논다. 굳이 싸운다고 볼 것까지는 없지만, 두 공간을 드나드는 세대는 현재 사회적으로 대립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대립성의 이면에는 외세 의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어려운 구석이 도사리고 있다. 어려운 구석 때문에 대립하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탑골 공원은 원각사 터에 1897년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탑골 공원은 다 알다시피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근대 한국이 태동한 독립의 모태라 할만하다. 그러나 지금 상태는 창피한 수준이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형식적인 기념물 몇 점이 초라한 상태로 놓여있을 뿐이다. 마지못해 한 숙제 같은 느낌이다.
주변상황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담으로 둘러쳐져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폐쇄적 공간이 되었다. 관철동, 인사동, 종로 3가, 낙원동 등 젊은이들의 환락 번화가에 둘러싸여 도심 속 외딴 섬이 되어버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성사업을 한다며 생색을 냈지만 국민들 눈치 보며 구색 갖추기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국가를 접수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격이다. 누구를 탓하랴.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운동사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이다. 이처럼 탑골 공원은 일본이 한국 근대사에 깊게 남긴 상흔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자기 고백서이다.
가장 소중한 정신적 중심지가 되어야 할 공간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꼬리를 이으며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탑골 공원에 비친 우울한 노인문제와 파고다 학원에서 관찰되는 젊은이들의 외세 의존현상이 그것이다. 탑골 공원 내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영어학원 빌딩이다. 살아서는 일제에 항거했고, 죽어서는 동상이 되어 영어에 항거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 선생의 기풍이 다하지 않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으로 느껴진다.
탑골 공원은 언제부터인지 소일거리를 찾는 노인들의 집합처가 된 지 오래다. 그나마 옛날에는 좀 나았을 듯 싶다.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간여하셨던 분들이 살아 계시던 때에는 가끔 이 분들의 무용담이나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통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분들도 하나 둘 세상을 뜨신 지금, 이곳은 말 그대로 오갈 곳 없는 노인들 집단수용소처럼 되어버렸다. 독립선언문을 읽으며 민족을 일깨웠던 노인의 동상 앞에 지금 우리의 노인들이 초라하게 앉아있다. 사회지도자로서의 기품은 사라지고, 사회에 부담이나 주고 쓸쓸히 소일하면서 해바라기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장기나 두고 낮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정도가 전부이다.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독립운동은 이처럼 무기력한 노인상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독립정신에 대한 무관심이 노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중의 우울한 상징성이다. 인터넷 Q&A 코너에 올라온 질문 가운데 "왜 탑골 공원에는 노인들이 많나요?"라는 질문이 있다. 그 답은 우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잘 모르겠지만 무료이고 밥도 주니까"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독립운동과 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수준이다.
영어 간판과 잘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넘쳐 나는 맞은편 학원가. 외관은 탑골 공원과 대조적이다. 투명한 유리와 날렵한 금속 재료로 지은 하이테크풍의 영어학원이 탑골 공원의 한국식 정문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 옆으로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학원들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이 나란히 있다. 세트로 갖춘 셈이다. 건너편 한국식 건물을 재래식이라고 비웃는 듯한 극명한 대비 구도이다. 탑골 공원이 문을 닫고 할아버지들이 쓸쓸히 돌아가고 난 저녁 시간, 그 맞은편 영어학원가는 밝은 불빛 속에서 젊은이들로 넘쳐 난다. 맞은편이 어둠 속에서 적막한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이곳은 오히려 더 살아난다.
그러나 길 건너 학원가도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으로는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파고다 학원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말을 배우는데 젊은 시절의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작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일본에 시달리던 것이 미국에 시달리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각자가 지닌 소질과 타고난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할 기회를 거의 가져보지 못한 채 영어공부만이 인생의 능사인 것처럼 내몰리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평생을 같이 할 직업이란 영어점수 잘 받고 컴퓨터 자격증 따놓은 다음, 기업체에서 나눠주는 자리에 가서 소모품으로 허덕이다 쓸모 없어지면 내버려지는 정도일 뿐이다.
젊은이가 자신의 창조적 적성을 찾아서 그것에 열심히 몰입하는 일, 그렇게 찾은 직업에 즐겁게 종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그러면서 창조적 생산을 해서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 그 보답으로 가족의 생활이 유지되고 그 자식도 또 그렇게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일, 그렇게 한 평생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살다 보면 사회는 노년의 장인에게 존경을 베풀고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게 하는 일.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사회 기풍이다. ‘개인-가족-사회-경제’가 자연스럽게 서로 협력하며 하나로 잘 돌아가는 구조이다. 이런 사이클은 우리 사회에서 씨가 마른 지 오래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천성과 직업과 전공과 적성이 있던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적성을 찾아 도서관과 연구실과 사회현장에서 고민하는 일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건강한 사회기풍이 시작되는 첫 단추이다. 젊음의 당연한 권리이고 사회에서 당연히 보장해주어야 하는 권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런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지 오래다. 영어권 선진국의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그 비참함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 나라 젊은이들은 자신의 적성을 마음껏 펼칠 직업을 찾아, 세계를 상대로 일하고 경영할 그 준비로 희망찬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젊은이들은 바로 그 나라 말 배우는 데에 인생 전부의 성공 여부를 걸고 버둥거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사이클이 깨진 곳에서 젊은이들은 부속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소모품으로 쓰이다가 여지없이 하루아침에 새 소모품으로 바꿔치기 당한다. ‘파고다 학원’에서 열심히 영어공부하며 젊음을 보낸 젊은이들이 나중에 갈 곳은 결국 ‘파고다 공원’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같은 ‘파고다’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지만, 두 공간은 섞이지 못하고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소 닭 보듯’ 서로에게 무관심하면 다행이요, 자칫하면 대치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도 하다. 파고다 학원을 드나드는 젊은이들은 절대 파고다 공원으로 넘어오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파고다 공원으로 출근하는 할아버지들에게 건너편 공간은 너무 이질적이다. 조폭들이 영역을 가르듯이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공간은 너무 다르며 따로 놀고 있다. 그 이면에는 스스로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해 연명해 가는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이 있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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