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디움을 빽빽하게 메운 붉은악마와 일본의 울트라니뽄이 잔디 경기장을 사이에 두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내지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오랜 앙숙관계인 두 나라의 국민들이 정기적으로 벌이고 있는 이 의식은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은유다.
축구는 단순한 오락이나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 인종 종교에 따라 피아를 구분하고 상대방에 대한 강렬한 적의를 ‘공차기’라는 비폭력적인 형태로 분출하는, 총성 없는 전쟁이자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한 세계화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강력한 신흥종교다. 미국의 ‘뉴 리퍼블릭’ 잡지사의 기자인 프랭클린 포어(Franlin Foer)가 쓴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는 세계 각국의 대표 선수, 감독, 열성적 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축구의 본질을 까발린다.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을 일으킨 세르비아 민족주의 광풍의 배후에는, 축구 구단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훌리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적 민족주의자와 갱스터로 이뤄진 이들은 전쟁과정에서 순식간에 잔인한 무장부대로 변신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뿌리 깊은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종파전쟁의 대리전 성격을 띈 구교의 셀틱 팀과 신교의 지원을 받는 글래고스 레인저 팀의 첨예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패한 축구 구단 소유주들과 정책 관료, 축구 스타들의 결탁이 이뤄지고 있는 브라질에서는 축구가 지배계층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탈리아에서도 현 총리이자 AC 밀란의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비롯한 과두재벌과 미디어가 여론조작의 수단으로 축구를 이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축구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적하려 한 것은 세계화의 한계다.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과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프로축구 리그를 안방에서 볼 수 있는 ‘세계화의 축복’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그것은 폭발 직전인 인종과 민족, 종교와 계급간의 갈등의 분출구에 불과하다는 것. 지금까지 나온 세계화에 대한 그 어떤 평가보다 독특한 주장이 실린 이 책은 미국 아마존닷컴과 반스앤노블닷컴에서 ‘2004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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