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도서전 개막때까지 매달 계속/ 이달엔 황석영·이문열 등 17명 참가
"십이월의 강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대동강에는 살얼음이 뽀얗게 덮여 있었다. 교각과 아치만이 남은 철교 위에 피난민들이 하얗게 기어올랐다…얘야 난 안 가갔다. 너이들이나 날래 따나라. 오마니 기달레보자우요. 사람들이 많이 줄긴 했시오."
17일 오후 1시 독일 동부 도시 라이프치히. 이날 개막한 도서전의 국제포럼장에서 소설가 황석영씨가 1972년 발표한 자신의 단편소설 ‘한씨연대기’의 한 대목을 소설에 쓴 대로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읽자, 30명 남짓한 독일 청중이 생경한 한국말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어 독일 탤런트 엥엘베르트 폰 노르트하우젠이 그 내용을 드라마틱한 감정을 실어 독일어 번역으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황석영 소설은 전쟁과 가난의 문학"이라는 사회자의 소개와 30분 정도 이어진 소설 낭독까지 듣고 난 뒤 한 청중이 질문했다. "황 선생님의 작품은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작품에 녹여내는 데는 내게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고, 지금은 동아시아적인 시각이라는 새로운 틀로 창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씨는 방북사건으로 투옥된 뒤, 화장실 휴지로 고통스럽게 작품을 썼던 경험도 덧붙였다.
독일에서 한국문학이 메아리치고 있다.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앞두고 한국문학 붐을 조성하기 위해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마련한 독일 순회 작가낭독회(LiteraTOUR)는 14일 시작됐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때까지 한여름인 7,8월을 제외하고 매달 독일을 권역별로 나누어 한국의 대표소설가와 시인 62명이 도는 이 행사는 규모도 규모지만, 이 같은 시도 자체가 처음이다. 한국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독일에 우리 현대문학을 ‘파종’한다는 의미가 자못 크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보다 유서 깊고 특별히 문학 전통이 강한 라이프치히 도서전을 중심으로 인근 예나-바이마르-드레스덴을 연계해 20일까지 진행되는 3월의 낭독회에는 ‘분단과 전쟁’ ‘인간과 권력’ ‘시의 힘’ 등을 주제로 소설가 이호철 윤흥길 홍성원 황석영 이문열 임철우 김영하 은희경 조경란씨와 시인 신경림 고은 정현종 이시영 최승호 허수경씨,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등 17명이 참여했다. 작가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룬 낭독회는 작가소개 영상물 상영, 사회를 맡은 독일 현지 문학평론가들의 작품 세계 설명, 한국어와 독일어로 작품 낭독, 청중 질문 순으로 진행됐다.
황석영씨의 소설을 비롯해 이날 라이프치히 도서전시장 내에서 소개된 임철우(‘붉은방’),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홍성원(‘무사와 악사’)씨의 작품이 주로 분단과 인간의 문제, 독재와 인간성 상실, 정의 등 정치사회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라이프치히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드레스덴에서 열린 소설가 은희경 한강씨의 낭독회는 삶의 의미를 천착하는 한국 여성작가의 소설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매력적인가를 잘 보여준 자리였다.
어두워지면서 간간이 비가 듣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작가낭독회 소식을 들은 독일인 30여 명이 오후 8시에 드레스덴의 전통 있는 문화공간인 쿤스트호프의 50평 남짓한 작은 서점을 찾아 들었다. 한강씨는 삶에서 소외된 여자가 식물로 변해간다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시종일관 진지한 어조로 낭독하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에서는 자신이 "농담과 아이러니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한 은희경씨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열 두 살짜리 소녀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첫 장편소설 ‘새의 비밀’을 읽어나갔다. 독일어 번역 낭독을 듣던 청중은 소설의 발랄하면서도 발칙한 상상력과 문장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행사를 주관한 한국문학번역원의 권세훈 팀장은 "독일 독자들이 작가와 만나는 문학낭독회나 토론회는 우리와 달리 매우 소규모"라며 "이 정도면 참여도가 높다"고 말했다. 황석영·임철우 낭독회를 보고 나온 독일 여성 울리아 포왈라(26)씨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워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오늘 새로운 작가를 더 알게 돼 좋았다"면서도 "일본소설이 독일의 유명출판사에서 적지 않게 번역돼 나와 있는 것에 비하면 한국작품은 지명도가 떨어지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번역물의 수도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라이프치히·드레스덴=글·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독일 대형 출판사들 한국소설 잇단 번역/ 중편 선집·황석영 작품 등 올해 출간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앞두고 한국소설이 주어 캄프, 데테파우 등 독일 주요 출판사에서 잇따라 번역 출간돼 한국문학을 알리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 동안 독일에서 한국문학작품이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지명도 낮은 출판사가 한국 정부나 민간문화재단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아 번역책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효과가 별로 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18일 한국문학번역원 등에 따르면 황석영씨의 소설 ‘한씨연대기’와 ‘오래된 정원’이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맞춰 독일의 대표적인 문학출판사 중 하나인 데테파우에서 출간된다. 데테파우는 또 내년에 황씨의 또 다른 소설 ‘손님’도 번역해서 낼 계획이다. 역시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출판사인 주어 캄프도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맞춰 박완서 이문열 이창동 최인석씨의 중편을 모은 ‘한국중편소설 선집’을 낸다. 이 출판사는 1995년 냈던 고은 시집 ‘조국의 별’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에 맞춰 10년 만에 재판을 찍을 계획이다.
지금까지 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등의 지원으로 독일의 펜드라곤, 페퍼코른 두 출판사에서 각각 20여 종의 한국작품을 독일어로 번역 출간했지만, 이 출판사들이 워낙 잘 알려지지 않아 한국문학을 독일에 소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열린 한국작가 낭독회를 보러 베를린에서 온 재독동포 최영순씨는 "펜드라곤에서 한국소설이 나온 줄은 알지만 서점에서 살 수 없었다"며 "데테파우나 주어 캄프 같은 큰 출판사에서 우리 소설이 번역된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는 17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시장에서 주빈국 행사 제2차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우창 조직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낯선 것들에 대한 이해가 세계인 모두에게 필요한 시기"라며 "낯선 것 뒤에 감춰진 많은 문화적인 진리와 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한국 주빈국 행사가 그런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라이프치히=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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