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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를 배우는 사람들/ "잔인하다고요? 자유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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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를 배우는 사람들/ "잔인하다고요? 자유로워요!"

입력
2005.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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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한테 며칠 안 맞으니 몸이 근질근질하네요."

8일 밤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종합격투기체육관 ‘정심관’. 격투기 하는 아들 따라다니며 못하게 말리다가 정작 자신이 격투기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는 이선광(47·자영업)씨가 알 수 없는 말로 너스레를 떤다. "아, 내 아들이 격투기 챔피언이거든요. 링에서 대련하면, 이 녀석, 아버지라고 봐 주는 법이 없다니까요. 발길질도 서슴지 않아요." 올 1월 군에서 제대한 아들 이효진(24·경북과학대 이종격투기학과1)씨가 머리를 긁적인다. "일단 링에 서면 ‘계급장’ 떼는 거잖아요. 죄송스럽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요. 운동 끝난 뒤 함께 샤워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40평 남짓한 체육관. 진한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20여명의 수강생들이 내지르는 힘찬 기합소리에 기분은 오히려 상쾌했다. 퍽퍽퍽 매서운 눈초리로 연방 샌드백을 두드리는 중년의 목사, 낙법을 배우느라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학생들, 퇴근하고 금방 도착한 20대의 유치원 여교사, 껑충껑충 뛰며 몸을 푸는 30대 후반의 노총각 사장님…. 저마다 다른 얼굴 다른 직업이지만 표정은 한결같이 밝고 활기가 넘쳤다.

격투기를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인터넷이나 밤 늦은 시간 케이블 TV 격투기 중계에 흥분하던 사람들이 이제 도복을 입고 링에 올라온다. 제 몸을 혹사하며 짜릿한 희열감에 빠지고 있다. 격투기가 ‘관전 스포츠’에서 ‘참여 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무술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브라질의 주짓수(유술), 러시아의 삼보, 태국의 무에타이 등 외국의 낯선 무술들이 속속 체육관을 ‘접수’하고 있다.

홍 회장은 "체육관에 ‘주짓수’라는 간판을 내걸기 시작한 건 약 3년 전부터고 그 전엔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끼리 정보를 주고 받는 정도였다"며 "그만큼 격투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고, 이제는 품새나 등급이 아니라 실제 그 무술을 얼마나 써 먹을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고 열풍의 이유를 진단했다. 일본의 정통 유도와 달리 주짓수는 실전(實戰) 유도를 표방, 온갖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다. 정심관 회원 함서희(여·선정여자실업고3)양은 "요즘은 사람이 가장 무섭잖아요. 이런 실질적인 호신술 하나쯤은 배워둬야 험한 밤길도 안 두렵죠"라고 말했다.

격투기는 어느새 잔인하다는 이미지를 벗고 친근한 생활체육이 되고 있다. 스트레스 해소와 군살 빼는 데 격투기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담. 홍 회장이 추산한 전국의 종합격투기 도장은 약 300곳이다. 정심관의 현재 회원수는 약 100명으로 20대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중년의 노신사도 있고 주부도 있다.

동생과 꺾기 연습을 하는 임석영(상신중3)군은 TV에서 조그만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큰 선수를 가볍게 꺾는 것을 보고 당장 체육관에 달려왔다. "격투기를 하고 나면 몸이 피곤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스트레스도 확 풀리고 공부도 더 잘 돼요. 다음 달엔 배 나온 우리 아빠도 꼭 모시고 올 거에요." 젊은이들이 격투기를 왜 좋아하는 지 알고 싶어 체육관을 들렀다 등록까지 하게 됐다는 교회 목사 서완호(55)씨. "막상 배워보니 생각처럼 격하거나 위험하지도 않았어요. 격투기는 어쩌면 나 같은 기성세대의 권위에 억눌린 젊은이들의 해방구 같아요." 얼마나 잽싸게 움직이는지 땀이 이마에 맺힐 새도 없이 뚝뚝 매트로 떨어졌다.

정심관 회원 신민철(38·게임회사 사장)씨는 링에 올라서면 묘한 분신술을 경험한단다. "일이 안 풀릴 때 한번씩 링에 올라오는데 그 때마다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돼요.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그 세포가 나를 움직이는 것 같아요. 격투기는 다른 것과 달리 이렇게 해야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간섭이 없어 좋아요." 최소한의 규칙, 최대한의 재미. 격투기는 복잡한 규정과 제도에 얽매여 정형화되고 갑갑해진 현실의 탈출구인 셈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무도(武道)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없이 오직 힘과 기술만을 강조하는 건 ‘뼈대 없는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다. 김세혁 삼성에스원태권도 감독은 "무슨 유행처럼 외국에서 들어온 스포츠에는 열광하면서도 정작 우리 고유의 무술은 ‘답답하다’ ‘실용성이 없다’느니 하며 퇴물로 취급하는 세태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 격투기 이래서 배운다

신민철(38·게임회사 사장·10개월)-사업 안 풀리고 머리 복잡할 때 링에 오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서완호(55·성지교회 목사·3개월)-나이 들어 떨어진 집중력 좋아졌고 관절 굳은 노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임석영(상신중3·4개월)-개운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풀리고 체력과 지구력이 강해진다.

이승희(영락중2·3개월)-열심히 배워 학교에서 친구 괴롭히는 못된 아이 혼내 주고 싶다.

이지혜(영락중2·3개월)-여자가 무슨 격투기냐고 엄마가 반대했지만 운동 끝나고 과외 받을 때 집중이 잘 된다.

이경희(영락중2·3개월)-살도 빠지고 자신감도 생겨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배우면 끊기 힘들다.

함서희(선정여자실업고3·14개월)-여군 되려고 시작했다. 실제로 술 마시고 내게 못된 짓 한 아저씨 혼내 준적 있다.

신세은(22·판매업·1개월)-근무 중에 손님 비위 맞추느라 받은 스트레스 샌드백 두드리면 확 풀린다.

이성관(47·자영업·3년)-스파링하면서 맞다 보면 몸이 가뿐해진다. 체력은 맞을수록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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