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독트린 배경
정부가 17일 성명형식으로 발표한 대일 신독트린은 ‘과거사 분쟁을 자제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설정한 1998년의 한일 공동 파트너십 선언이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한일 관계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성명은 95년 무라야마 일본 총리 담화, 98년 파트너십 선언 이후 일본이 여러 번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했지만 이를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DJ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현 정부가 지난 2년간 미래와 우호에 비중을 두었지만 일본의 무성의로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부는 ▦일본 지도층의 시대착오적 역사관, 퇴행적 언행 증가 ▦역사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 가능성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을 이 같은 평가의 근거로 제시했다. 이는 "일본이 과연 동북아 평화세력으로 이웃과 공존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근본적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는 우려로 이어지면서 4대 기조와 5대 방향의 강경한 대일 외교 원칙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 신독트린은 일본의 잘못으로 비롯됐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아쉬움도 남기고 있다. 정부가 2월22일 시마네((島根)현 의회의 조례 제출 이후 한 달도 안돼 대일 정책의 기조를 바꿔야 할 정도로 속보(速步)를 취해야 하느냐는 우려도 엄존하고 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5대 방향
1. 독도 문제
정부의 대일 독트린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최강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단호히 대처한다는 기존 입장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독도문제가 주권과 과거사의 양 측면을 모두 지니는 중대한 현안임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태식 외교부 차관은 "1905년 2월22일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신의 땅으로 편입했던 일본 시마네현이 100년이 지난 지금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침략 역사의 부활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차관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있을 수 있는 행동을 다시 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정부는 이에 덧붙여 16일 통과된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가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고, 우리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독도 입도 허용 등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할것으로 예상된다.
2. 역사왜곡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두 가지 메시지를 던졌다. 첫째는 일본의 역사 왜곡이 오히려 늘면서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과거사 문제는 인류보편적 가치와 상식을 바탕으로 풀자는 것이다.
정부는 독도와 마찬가지로 역사 왜곡을 식민지 침탈의 정당화 시도로 규정하면서 최근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르는 현실을 중시한다고 지적했다. 정치인들의 퇴행적 행태 뿐만 아니라 일본 중앙정부도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어물쩍 검정하려는 분위기라는 점도 짚었다. 2001년 극우 성향의 후소샤(扶桑社) 출판사 역사교과서를 검정한 일본 문부성이 우리 정부로부터 35개항의 수정 요구를 받았음에도 아직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이 과거 천명한 반성과 사죄마저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고 경고했다.
이어 정부는 과거사의 철저한 규명에 바탕을 둔 진정한 사과 및 반성, 그리고 용서와 화해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방식으로 풀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밝혔던 것이다.
3. 일제 피해자
정부는 일제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 문제에서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한국은 한국이 할 일을 할 것이고, 일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태식 차관은 "기본적으로 1965년 한일 협정의 적법성을 인정한다"면서 "다만 협정 체결 당시 제기되지 않았던 군대위안부, 사할린 교포, 원폭 피해자 문제 등에 대해 우리 정부도 책임을 질 것이고, 일본정부도 도의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1965년 일본 정부의 국가 배상 문제를 논의할 당시 한일 양측은 징용 징병 피해 등 8개 항목만을 상정해 이후 제기됐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는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는 인식이다.정부는 올 초부터 일제 피해자 조사를 통해 실태를 파악하고 있으며, 파악 후 구체적인 보상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본도 역사의 부채를 서둘러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촉구를 보낸 것이다.
4. 일본 국제위상
정부는 일본이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지도적 국가로 존경 받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뢰를 얻는 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표현은 완곡했으나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견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유엔은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5개 국가가 맡고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7개 국가로 확대 개편할 계획이다. 일본은 상임이사국에 진출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정부는 "주변국의 신뢰도 얻지 못하는 일본이 주요 국제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 일본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특히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켜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강수이기 때문에 향후 일본의 반응이 주목된다.
5. 문화교류
정부는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교류협력은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뜻을 아울러 밝혔다. 정부는 성명에서 일본을 "미래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함께 구현해나갈 동반자이자 공동운명체"라고 표현하며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인적, 문화적 교류협력사업 만큼은 이번 사태와 분리하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그러면서도 양국 시민사회간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양국 사회 저변에서부터 역사문제 해소기반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활발한 교류로 일본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노력을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 당국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취지다. 이는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과정에서 보여준 한일 양국 시민단체간 협력의 성과가 컸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정부가 기대를 걸고 있는 대목이다.
정상원기자
■ 이태식 외교차관 문답/ "한일관계가 제대로 서야 한미일도 좋아져"
이태식 외교부 차관은 17일 정부의 대일 신 독트린 발표 후 "일본사회와 정부, 국민의 성의 있는 대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일협정은 어떻게 되나.
"정부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다만 군대위안부, 원폭피해 등 한일협정 체결 당시 제기되지 않았던 일에 대해 정부가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고, 일본도 도의적으로 책임질 부분 있을 때 함께 해 나가자는 것이다."
- 일본의 국제사회 지도국 책임을 강조했는데,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한다는 뜻인가.
"일본이 중요 국제기구에서 주도적 역할 담당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와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독도문제를 과거사 왜곡으로 보고 대응할 것인가.
"독도가 한국 영토임에도 1905년 2월 시마네현의 고시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근거를 일본측에 제공해줬다. 이번 일도 과거 식민지시대 때 했던 일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독도문제가 불거진 배경에는 미국과 일본의 유례없는 유착이 있지 않나.
"한미일 협력과 한미동맹, 미일동맹이 극동지역의 안정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제대로 정립됐을 때 한미일 협력 강화하고 더욱 바람직한 미래동맹으로 나갈 수 있다."
- 참여정부 임기 중 과거사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것을 백지화한 것인가.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고, 더 이상 과거사가 장애가 돼서는 안되겠다는 취지에서 했던 말이다. 하지만 한국만 과거를 놔두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느냐.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손 붙잡고 뒤 돌아보면 바람직한 협력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약속 번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사회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한 실망감으로 봐달라."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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