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이거 500원에 사 가세요."
토요일인 12일 오후 3시 경기 안양시 평촌중앙공원 차없는거리. 꽃샘추위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매서운 영하의 날씨인데도 초등학생들이 손을 호호 불며 손님 끌기에 한창이다.
인근 경남아파트에서 왔다는 초등학생 류지원(10) 이정윤(10) 최성윤(11) 양은 동생들이 한참 전에 뗐을만한 낡은 그림책과 카드묶음, 유리구슬, 인형 따위를 들고 나와 제법 그럴듯하게 펼쳐놓았다. 또래 아이들이 흐트러놓고 그냥 가면 다시 반듯하게 정리하는 품이 영락없는 장사꾼이다.
그 옆에는 노현주(16·부안중)양이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만화책을 팔고 있다. "제가 다 읽은 만화책인데요. 10권 정도 팔아서 8,000원 벌었어요." 노양은 읽고 난 만화책을 팔아서 다시 만화책을 사거나 용돈으로 쓴다고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이곳 평촌중앙공원 차없는거리는 세월의 때가 낀 물건들이 다시 햇빛을 보는 ‘난장’으로 변한다. 헌옷, 구두, 책, 가방, 장난감, 인형, 청바지, 액세서리, 스카프, CD, 한복 등 없는 게 없다.
보기 드물게 보관상태가 좋은 ‘A급 물건’은 1만원 단위가 넘어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대체로 천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면 호기롭게 손님 행세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학창시절 입었던 청바지를 가지고 나온 한 아주머니는 "영원히 간직하려고 했는데 그냥 두면 벌레만 슬 거 같아 들고 나왔다"면서 "한 벌 두 벌 팔릴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나눠 쓴다는 의미에서 잘 가지고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 아주머니는 깨끗하게 세탁된 청바지를 단돈 1,000원에 팔고 있었다.
폭 8c, 길이 200여c의 평촌중앙공원 차없는거리가 벼룩시장이 된 것은 2002년 봄 무렵이다. 환경부가 자원 재활용을 위해 각 시·군에 ‘아나바다’ 장터 활성화를 요청하면서다. 평촌신도시 주민들은 물론 안양 사람들과 멀리 성남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와 좌판을 벌이고 손님들이 모여들면서 이곳 장터는 착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날씨가 좋을 때면 길 가운데까지 좌판이 세 줄이나 늘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다. 좌판 수만 300여개, 바람 쐬러 나온 행인들까지 합치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운집한다. 운영시간은 오후 2∼5시지만 차량 통제가 시작되는 12시부터 좌판들이 들어서 해질 때까지 흥정이 이어진다. 단 좌판은 당일 현장에서 배정되며 안양시민들에게만 허용된다. 장터가 유명세를 타면서 헌옷을 구입해 내놓는 기업형 좌판도 생겨나 가끔 단속반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성남시 분당구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는 이은영(37)씨는 "큰 아이에게 입힐 드레스 4벌을 3,000원에, 작은 아이에게 꼭 맞는 부츠를 3,500원에 사 횡재했다는 느낌"이라면서 "요즘 아이들이 부족한 걸 모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 아이들은 살아있는 경제 공부를 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날이 어스름해지자 "떨이에요, 떨이요. 이거 다해서 500원. 정말 싸요"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린다. 추위가 저만치 물러갔다.
이범구기자 gogu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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