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동베를린출판사에서 번역대회를 열었다. 공고를 본 하이디 강(66) 한국외대 교수는 안소현(45·연세대 독문과 강사)씨를 떠올렸다. 독일문화원 통·번역반에서 강씨의 수업을 듣는 안씨는 재능 있는 독일문학도이면서도 소설을 끼고 사는 학생이었다. 함께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이 번역한 박완서 단편 ‘더위먹은 버스’는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지 12년째, 지금까지 번역한 우리 소설이 20편이 넘는다. 그들이 이번에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 번역에 도전하고 있다. 16일 강 교수 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칼의 노래’ 중 ‘그 바람은 숨막혔다’를 어떻게 번역할 지 고심하고 있었다. "이 한 문장을 갖고 끙끙 앓고 있다"고 강씨는 말했다. 30년 넘게 한국에 살아온 독일인 강씨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안씨가 자세한 설명을 더했다. "소설의 주인공 이순신은 무인이되 전장에서의 승패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문맥상 그 바람은 ‘과도했다’ ‘지나쳤다’ 정도의 뜻이겠지만 그렇게 옮기면 밋밋해요. 그렇다고 ‘숨막혔다’를 독일어로 그대로 쓰면 독일 독자들은 어리둥절해 할 테고…"
외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과 한국사람의 공동 번역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어 효율적이다. 선택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의 폭도 넓어진다. 일단 텍스트가 정해지면 각자 책을 읽으며 단어를 생각해둔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나 함께 문장을 만든다. 하루종일 씨름해도 번역하는 분량은 대여섯 쪽이다. 조경란의 단편 ‘불란서 안경원’을 옮길 때는 ‘거인의 오줌발 같은 비’라는 구절을 두고 며칠을 논의하기도 했다. 신선하고 강렬한 이 비유가 독일어로 옮겨놓으니 거북스러운 표현이 돼버려서다. 한국어와 독일어의 이런 간극을 좁히는 것이 두 번역자의 임무다.
공동 작업인 만큼 부딪칠 때도 있다. 안씨가 섬세한 묘사를 아끼는 반면 강씨는 명확한 전달이 우선이다. 독일 독자들에게는 간결한 서술이 호소력이 있으니 긴 묘사를 쳐내야 한다고 강씨가 주장하면, 안씨는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문장을 붙든다. 의견은 달라도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은 하나다.
10년 넘게 한국 문학을 독일어로 옮겨 왔지만 두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한국 문학이 아직 독일에서 크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 활동이 필요하다"(하이디 강), "다양한 작가군을 발굴해 내 조직적·국가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안소현) 강조한다.
아름다운 텍스트가 번역에 들어가면 역자를 물고 할퀴기 시작한다. 하루 이틀이면 다 읽는 소설도 공들여 번역하려면 1년 가까이 걸린다. 두 사람은 "그래서 좋다"고 말한다. 채만식 소설 같은 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진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는 강씨, 쉽지 않겠지만 이문구 송기숙 등 우리 글맛이 넘쳐나는 소설을 옮겨보고 싶다는 안씨. 두 사람은 "번역하면서 문학작품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힘들지만 가치있는 도전"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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