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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책/ "日 대동아 패권주의 반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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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책/ "日 대동아 패권주의 반성은 없다"

입력
2005.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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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지 100년, 또 광복 60년과 한일협정 40년을 맞는 올해는 안타깝게도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별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독도 망언’으로 불거진 최근의 한일 갈등을 보자면, ‘일본은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 패권주의 침략주의를 노골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종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의 정치사회의식, 또 대외인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일본학자들의 책이 잇따라 번역 출간됐다.

일본사상사를 전공한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일본 오사카대 명예교수가 쓴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근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역사비평사 발행)은 과거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지금 동북아를 중심으로 새롭게 이야기되는 ‘동아시아공동체론’이 과연 전혀 다른 맥락인지를 되묻는 책이다. 그가 일본의 아시아 인식을 검증하려는 것은, 20세기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에 품었던 야욕의 맥을 잇고 있는 일본의 아시아 인식에 대한 자기 검증 없이는 제국주의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1850년 동아시아가 비로소 세계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 193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열강으로 나서는 시기, 그리고 1945년 패전 이후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이웃나라 중국이나 한국과의 역사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는 데서 보듯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종지부를 찍지 않고 소생된 게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전후의 일본은 아시아 문제에 침묵했다. 저질러 놓은 일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침묵하는 사이 지금 일본이라는 국가는 역사문제에 무책임해졌다’는 분석이다.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도쿄외국어대 교수의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삼인 발행)는 전후의 일본이 침략주의, 패권주의로 치닫던 전전의 일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을 담은 책이다. 그의 지적이 예리하고 또 놀라운 것은 비판의 표적이 일본의 보수·우파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전후 일본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 받는 비판적인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는 막스 베버와 칼 맑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경제사의 토대를 다진 경제사학자이며,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계몽주의 시각으로 일본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맹렬히 비판해 근대시민사회 건설을 주창해온 일본 정치사상계의 거장이다. 나카노 교수는 1930, 40년대 이들의 사상을 검토한 결과 오쓰카의 경우 전전에는 생산력 증강을 위해, 전후에는 전후 부흥을 위해 일관되게 ‘국민 동원’의 논리를 폈으며, 국민의 ‘자발성’을 강조한 마루야마 역시 그 논리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는 동원의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결국 전후의 일본사회는 전전과 마찬가지로 국민동원이라는 ‘총력전’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전후인식이 얼마나 무반성적인가’는 그가 지적한 이런 대목에서 확연하다. ‘8월 15일 종전기념일 전쟁의 잔학을 무용담으로 바꿔 기적적인 부흥을 말하고, 그것을 이룩한 근면을 자화자찬하는 기억의 제전은 헌법기념일보다 훨씬 중요한 행사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옛 군위안부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해보라. 전쟁을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당연히 초대해야 마땅할 그들의 존재가 이 국민적 의식에는 얼마나 이질적이고 파괴적인가.’

이보다 앞서 나온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문학 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평론선집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발행)도 일본의 근대와 아시아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한 책이다. 다케우치는 메이지 시기의 ‘심정적 아시아주의’는 ‘탈아입구(脫亞入區欠)’의 논리에 묻혔다가 급기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파시즘의 논리로 변질됐다고 본다. 일본이 새롭게 아시아의 일원이 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 그는 아시아의 진정한 연대는 전후의 일본 지식인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잘못된 근대를 넘어설 때만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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