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혼례의 전안례(奠雁禮)에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전통이 담겨 있다. 신부 집에서 높은 탁자에 곡물과 과일 등을 올린 전안청(奠雁廳)을 설치해 놓으면 신랑이 기러기 한 쌍을 든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도착한다. 신랑이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바치면 신부 어머니는 이를 전안청에 모신다. 이 전안례가 끝나야 신랑은 장인께 재배하고 본격적인 혼례를 올린다. 전안례는 기러기처럼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아들딸을 많이 낳아 백년해로하게 해 달라는 기원이다. 처음엔 산 기러기를 쓰다가 나중엔 나무로 만든 목안(木雁)이나 닭으로 대신 했다고 한다.
■ 기러기는 기러기목 오리과의 철새로, 한자어로는 안(雁) 홍(鴻), 영어로는 wild goose 즉 야생 거위다. 기러기는 땅위에 둥우리를 틀고 짝지어 살며 한배에 3~12개의 알을 낳아 한 달 정도 품는데 암컷이 알을 품는 동안 수컷은 주위를 경계한다. 시베리아 동부와 사할린, 알래스카 등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북미 등지로 찾아오는데 우리나라에는 회색기러기 쇠기러기 등 7종이 찾아 온다.
■ 기러기가 시 동양화 등에 이별의 아픔이나 부부애를 상징하는 소재로 자주 애용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기러기에 대해 낭만적인 정취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기러기가 편평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모습’이란 뜻의 ‘평사낙안(平沙落雁)’이 글이나 문장이 매끄럽게 잘 되었음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는 것도 기러기의 기품 탓이리라. 남의 형제를 높여 일컫는 안항(雁行)이란 말도 다정한 형제처럼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에서 찬바람을 타고 온다고 하여 ‘삭조(朔鳥)’, 암수의 신의가 깊다고 ‘신조(信鳥)’, 서리 내리는 계절을 알린다고 ‘상신(霜信)’으로도 불렸다.
■ 자식을 유학 보내고 국내에 혼자 남은 가장을 지칭하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을 누가 처음 썼는지 몰라도 참 절묘한 조어다. 알을 품은 암컷을 보살피는 수컷의 모습이나 무리들의 단란한 가족애는 인간이 부러워할 만하다. 외기러기가 처량해 보이는 것도 도타운 가족애 때문일 것이다. 가족과 떨어진 가장의 모습은 영락없이 외기러기다. 유난한 자식사랑으로 많은 가장들이 기러기 아빠가 되었지만 이 때문에 겪는 아픔과 비애가 너무 깊은 것 같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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