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가? 그간 여러 이론들이 제시되었지만 프로이트의 견해는 독특하다. 그는 개인이나 집단이 표현의 자유를 통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표현의 자유가 심리학적으로 유익하다는 걸 높이 평가했다. 표현의 자유는 이른바 ‘카타르시스 효과’를 가져와 공격적 욕구를 해소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냉소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오늘날 표현의 자유를 밑천 삼아 운영하는 언론의 첫 번 째 기능이 ‘카타르시스 효과’라는 걸 부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한국언론을 지배하고 있는 ‘정파적 저널리즘’ 모델은 언론을 ‘카타르시스 산업’으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그 기능에 충실하다.
그러나 카타르시스 산업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크게 성장한 동시에 내부적인 구조변동에 직면해 있다. 카타르시스 기능에 관한 한 그 어떤 매체도 인터넷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요 기능이 엔터테인먼트인 텔레비전은 큰 타격을 받진 않을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건 바로 신문이다.
신문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신문은 몰락하고 말 것인가? 최근 미국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는 인터넷의 힘이 커져 온갖 매체의 뉴스가 난무할수록 신뢰성 있는 정보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신문은 결국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단 새파이어뿐만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이 신문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신뢰’와 ‘권위’다. 만약 이 대안이 타당하다면, 한국 신문은 기존 ‘카타르시스’ 기능과 ‘정파적 저널리즘’ 모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최근 일부 보수 신문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략적인 ‘캠페인 저널리즘’에 집착하고 있는 건 신문 시장 전체의 공멸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신문이 고수하고 있는 기존 ‘계몽 패러다임’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신문의 생명은 비판에 있다는 대원칙을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보통 사람들도 비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비판은 정파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신뢰’와 ‘권위’를 주장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겨우 40%대의 구독률과 20%대의 신뢰도를 누리고 있는 신문이 비판에만 몰두해야 하겠는가?
정치인 및 정치화된 시민들은 각자 평행선을 달리며 따로 놀기 때문에 비판의 효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카타르시스 기능에 충실한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정치 과잉’의 현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한국 정치는 ‘누가 더 잘 하나’ 경쟁이 아니다. 누가 더 못하는가를 고발하는 경쟁이다. 그래서 비판을 받으면 더 잘해 볼 생각은 않고 왜 저쪽이 더 잘못했는데 우리를 비판하느냐고 억울하게 생각한다.
요즘은 어린 애들도 훈계하고 가르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권을 대상으로 계몽을 시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중간적 입장을 부각시키고 대안 제시에 주력해 ‘신뢰’와 ‘권위’를 얻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판은 쉽고 대안 제시는 어렵다. 이건 신문의 입장에선 제작비용의 문제다. 그래서 신문이 비판을 선호하는 것이겠지만, 습관도 적잖이 작용한다. 이제 기자들은 모든 전통적 저널리즘의 관행을 의심해 보고 새로운 자기계발에 나서야 한다.
외부 필자에게도 대안 제시 위주의 칼럼을 요청함으로써 비용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은 ‘배설 기능’에 탁월한 인터넷과는 다르게 가면서 ‘신뢰’와 ‘권위’를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것이 스스로 이루는 언론 개혁의 길이기도 하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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