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을 즐기기 위해서는 추위와 칼바람도 견디며 기다려야 한다. 요즘 방송가는 봄맞이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MBC와 SBS가 최근 신임 사장을 임명했고, EBS는 사장을 공모중이다. 스카이라이프 역시 곧 신임 사장을 선정할 예정이다. KBS는 작년의 천문학적 적자가 공표된 이후 제기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분주하다.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사업자인 TU미디어는 본방송을 앞두고 시험방송을 시작하였고, 지상파DMB 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어려운 작업들이 진행중이다. 케이블TV는 방송 시작 10주년을 맞아 디지털방송의 청사진을 거창하게 발표했고, 인터넷망을 이용한 멀티미디어 방송 IPTV의 시작도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진짜 봄이 오기 위해서는 진행 중인 많은 사업과 논의 중인 많은 쟁점들이 합리적으로 정돈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 사안들을 그저 하나의 논리로만 해결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느껴져서 갑갑하고 답답하다.
생래적으로 방송은 공익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공적 재산인 주파수를 ‘빌려서’ 방송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상파에서 IPTV에 이르기까지 매체의 다양화와 혼성화가 분명한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맥락과 무관하게 ‘공익성’의 논리가 모든 다른 논리들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SBS는 공영성이 강화된 민영방송 상을 만들겠다고 하고, KBS는 공영방송으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지상파DMB사업자 선정의 제1기준 역시 방송의 공적 책임과 공익성 실현 가능성이다.
일반 기업들 역시 사업의 성과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등 공공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나 교회에 적용되는 도덕 논리를 기업에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방송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유구조가 전혀 다른 SBS에게 KBS에 준하는 공영성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SK텔레콤이나 KT가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의 방송서비스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업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책임감, 예를 들어 식품회사가 국민건강을 고려해야 하는 당위성 이상의 의무를 부여하고 강요하는 것은 매체발전의 경향과 어긋나는 일이다.
축구시합을 하더라도 동네축구와 프로축구에 적용되는 룰은 다르다. EBS 사장을 MBC 사장 선정과 같은 기준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 지상파DMB 사업자를 선정할 때도 지역민방 선정하듯 비슷비슷한 논리가 적용되어서도 안 된다. 수신료 인상에는 적극 공감하지만, 공영방송 KBS가 재벌기업과 다를 바 없는 문어발 사업을 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스카이라이프나 케이블TV는 DMB나 IPTV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창의적 기업가정신이 더 필요하다. 신문사 경영이 모기업 건설회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시기가 지났듯이, 작은 콘텐츠 하나 제공하면서 "우리도 방송한다"고 우쭐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하도 많은 종류의 방송 서비스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공되다 보니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단순화된 철학이나 정책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각 서비스들이 독자적인 지향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공영과 민영 중간쯤 위치한 MBC는 한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방송철학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SBS는 민영방송으로서 공공에 기여할 수 있는 떳떳한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케이블TV나 스카이라이프, TU미디어는 공영방송의 철학도 자유시장의 논리도 극복할 수 있는 자기의 길을 가져야 한다. 만병통치약처럼 적용되는 ‘공영성’의 논리로부터 아주 조금만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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