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숨소리도 새나오지 않는다. 소름 끼치는 고요. 그 사이 해는 힘겹게 정상을 향해간다. 그리고 정오. 비로소 인기척이 들린다. 참았던 긴 한숨. 또 하루의 삶을 얻었다. 가슴에는 빨간 딱지. 나는 사형수다.’ 사형은 오전에 집행된다. 해서 사형수는 정오까지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오늘도 미집행 사형수 60명이 정오를 기다린다. 1997년 12월, 23명이 한꺼번에 형장으로 간 것을 마지막으로 사형은 한 건도 집행되지 않았다. 집행 결정권자인 김승규 법무장관이 최근 그 이유를 밝혔다. "98년 %C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사형제 폐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서."
어느 여론조사에서나 ‘사형제 필요’ 응답이 절반을 넘는다. 질문을 받는 순간 많은 이들은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범, 패륜을 저지른 존속살인범, 극악무도한 파렴치범을 떠올린다. ‘내가 봐도 용서가 안 되는데’, ‘그런 놈은 죽어도 싸다’는 감정적 판단이 우선한다. 법무장관도 극단적 예를 들어 존치론을 편다. 잊혀졌던 우순경, 김대두, 지존파, 막가파를 끄집어내고, 최근 유영철도 언급한다. "과연 이들 한 명의 생명은 존귀하고,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생명은 존귀하지 않은가."
폐지론은 인간존엄의 기본가치에 호소한다. 생명권은 절대가치이며 흉악범죄 예방 등 다른 목적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 생명을 빼앗아 피해자의 복수심을 국가가 대신 하는 것이라면 헌법이 보장한 인간존엄의 가치를 국가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판 가능성도 또 다른 논거다. ‘오판 확률이 낮다면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감수해야 한다’고 할 때 폐지론자들은 말한다. "제3자에게는 미미한 확률일지라도 사형 당사자에게 그 오판은 100% 확률"이라고. 사법살인의 오명을 남긴 인혁당 사건을 보라. 선고 뒤 24시간도 안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피맺힌 억울함은 어찌하겠냐고.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가 본격 논의된단다. 재적 3분의 2에 가까운 175명이 서명했다. 감형 없는 종신형이 대안으로 나왔다.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의 법 감정까지 고려해 결정 내려야 할 때다. 한번 생각해보자. 피해자의 증오가 아무리 커도 단 한번의 오판으로 사형 당한 이의 억울함에 비할 수 있으랴. 또 아무 죄도 없는 사형수 가족에게 평생을 낙인찍혀 살아가라 강요할 수 있나. 지존파 살인범이 집행장으로 가면서 한 마지막 부탁이 "내 장기를 기증해 달라"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죽여야 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봄이다. 겨울 마지막 잎사귀가 말라 떨어진 자리에 다시 파릇파릇 새 잎이 돋아난다. 누군가 무참히 잎을 뜯어내고 주변 가지까지 손상시킨 곳에는 잎이 새로 나지 않는 것과 달리. 3월7일자 ‘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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