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이 물음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즐거우니까. 공부보다 더 즐거운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다른 것들도 얼마간 즐거울 수 있으나,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니 즐거움이 줄어든다. 공부는 그렇지 않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해도 줄곧 즐겁다. 하면 할수록 더 좋아 그만둘 수 없다. 공부에서는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전에 없던 경지로 나아간다. 새로운 것을 남들에게서 받아들이다가 스스로 찾아내는 감격을 매번 다르게 경험한다. 받아들이기만 해도 흥겨운데 찾아내기까지 하니 더욱 신명난다.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아내고 그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공부에서 얻는 보람의 극치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목마를 때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좋은 책을 찾아 도서관을 뒤지고 서점으로 간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아직 읽지 않은 책으로 가득 차 있는 서점에 들어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많은 시간 머무르면서 꼭 읽어야 할 책을 한 아름 찾아낼 때의 자랑스러움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지도에서나 보던 먼 나라, 처음에는 생소한 도시에 가서, 품격 높은 서점을 모두 뒤져 최상의 책을 찾는다. 꿈이 있으면 실현할 수 있다. 파리, 런던, 도쿄, 교토, 함부르크, 베를린, 레이덴, 암스테르담, 룬드, 스톡홀름, 루벤, 브뤼셀. 코펜하겐, 오슬로, 싱가포르, 뉴델리, 베이징, 보스턴, 뉴욕, 프레토리아, 쿠알라룸푸르. 책 사냥을 하러 간 도시이다. 서점이나 서적의 질로 순번을 정해 만든 명단이다.
특기할 만한 사항을 추가한다. 파리에서는 그 쪽 책만 구하지 않고,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베트남 등지의 문학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도 거듭 찾았다. 도쿄가 자랑하는 고서점가의 모든 점포에 들렀다. 유럽의 작은 나라 오래된 도시는 고서 박물관 같은 곳들임을 알고 놀랐다. 뉴델리 한 모퉁이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문학아카데미에 들러 널리 보급하지 않고 쌓아둔 출간물을 뒤져 필요한 것을 다 샀다.
좋은 책을 만나, 저자는 알고 나는 미처 모르던 것을 받아들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빠지면서 읽는 것만은 아니다. 빠지면서 읽기에서 따지면서 읽기로 나아가는 독서를 하면 더 즐겁다. 따지면서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토론을 한다는 말이다. 토론을 하면서 내 생각을 가다듬는다. 따지면서 읽기를 하다가 다음 단계인 쓰면서 읽기로 나아간다.
독서를 하는 과정의 토론에서 내가 한 걸음 더 나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비판과 반론을 전개해 새로운 책을 쓰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서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 '한국문학통사'를 쓰고 다시 거듭 고치느라고 관련된 모든 논저를 보아야 하는 중노동이 사는 보람을 가중시켰다.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세계문학사의 전개'등에 관한 작업은 멀리 나다니면서 책 사냥에 욕심을 낸 결과이다. 여러 학문에 관한 업적을 많은 나라에서 만나면서 토대를 넓히고 구상을 키웠다. 그 덕분에 50여 종의 책을 냈다.
그러나 지식을 많이 얻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이미 해놓은 일에 묻혀 헤어나지 못한다면 즐거움은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면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깨달은 바를 입증하고 널리 펴기 위해, 이미 이루어진 지식을 증거로 삼고 부품으로 이용해야 한다. 학문의 저작은 몇 만 개의 부품을 필요로 하는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더욱 정교하다. 부품이 따로 놀지 않고 각기 맡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총괄 설계가 생명이다.
밑변과 꼭지점을 들어 양쪽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많은 부품 또는 기존의 지식으로 밑변을 늘려야 총괄 설계를 탁월하게 해서 꼭지점을 높일 수 있다. 밑변을 넓히는 데만 힘쓰고 꼭지점을 올리지 못하면 움직이지 못하고 보이는 것이 없다. 밑변이 좁은 것을 무시하고 꼭지점을 무리하게 높이는 구조물은 쉽사리 허물어진다. 밑변과 꼭지점은 반대가 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서로 필요로 하는 생극의 관계를 가진다. 상극과 상생을 각기 체험하고 한데 합치는 과정에 긴장된 즐거움이 있다.
밑변 넓히기와 꼭지점 올리기는 불교의 교종과 선종에서 하는 공부와 상통한다. 경전을 널리 학습하는 교종의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학승이다. 참선을 해서 깨달은 경지에 이르면 선승이라고 한다. 양쪽을 함께 하는 것이 공부의 이상이다. 많이 알면서 깊이 깨달아야 지식이 자기 것이 되고, 깨달은 바를 널리 펼 수 있다.
선승과 학승을 겸할 수 있는가?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을 만나 이렇게 물었더니 선승은 학승을 겸할 수 있어도, 학승은 선승을 겸하지 못한다 했다. 학문을 하는 공부는 어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없으면 지식이 무용하다. 지식이 많으면 더욱 거추장스럽다. 나중에는 운신하지도 못한다.
학자의 길로 나서고 이렇다 할 저작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천성이 게을러서 그럴 수 있다. 의욕을 잃을 만한 사정이 생긴 탓일 수도 있다. 학문 이외의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 본업을 소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이다.
많이 알면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연구할 만한 것을 남들이 이미 다 찾아내 해결한 탓에 새로운 과제는 없다고 하게 된다. 적당하게 무식한 덕분에 아무 말이나 겁 없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다고 한다. 지식을 제공하는 강의는 즐겁지 않더라도 생업이니까 피할 수 없지만, 논문을 쓰고 책을 지어 자기가 무엇을 새로 알았다고 하는 거짓말은 되도록 피한다. 공부가 즐겁다는 위선을 경계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는 것을 새롭게 휘어잡아 올라서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밑에 처져 있으니 유식이 무식이다. 몰라도 그리 큰 지장이 없는 것들은 너무 많이 알고, 꼭 알아야 하는 단 하나의 이치는 모른다. 휘어잡아 올라가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스승도 소용없고, 어떤 명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리를 비워야 한다. 일자무식이라야 최상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인도에서는 말한다. 불행히도 글을 배웠더라도, 일자무식의 정신으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 글로 씌어 있는 모든 것을 멀리 하고, 궁극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종교의 성인은 한 번 깨달으면 모든 의문을 다 풀어줄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는 거듭 다시 깨달아야 한다. 출가해 입산수도하는 것을 일상생활로 해야 한다. 책을 덮고 책상 앞을 떠나는 것이 출가이다. 산에까지 가지 못하고 교정이나 길거리를 거닐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 입산수도이다.
나는 공부하는 자리를 어디서 펴든 나다니기를 좋아했다. 영남대학교의 넓은 교정을 거닐면서, 한국학대학원 시절에는 주변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전철역에서 내려 서울대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지금은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면서 내 나름대로 공부의 도를 닦는 방법을 터득했다. 산천초목이 책을 대신하는 곳에서 막힌 생각을 풀고, 숨은 원리를 깨닫는다. 머리 속에서 먼저 쓴 글을 나중에 종이에 옮겨 적는다.
깨달음이란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숨어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타난다. 갑자기 한 소식 올 때의 놀라움. 짙은 구름이 걷히고, 새 천지가 열린다. 서로 무관하던 것들이 하나로 꿰어진다. 겉만 보이던 것들이 속을 드러낸다. 천고의 비밀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아 여기가 정상이구나. 산에 오르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고 정상에 이르렀다.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던 정상이 이렇게 가깝단 말인가? 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그 뒤에 이어진다. 정상에서 느낀 감격이 하산의 지루함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이유이다.
자료를 모으고, 논증을 진행하고,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하는 과정은 지루하고 힘들다. 그러나 깨달음의 즐거움이 모든 작업의 시발점이고 추진력이라 무엇이든 감내하면서 신명나게 내달릴 수 있다. 노력의 결과가 논저로 나타나 손에 쥐어졌을 때 애초의 깨달음을 되새기고 그 뒤의 진행을 되돌아보면서 말한다. 이렇게 높은 산을 나도 모르게 올랐구나 하면서 놀란다.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즐거우니까 한다. 이렇게 대답해도 납득하지 못하면, 공부는 일종의 미친 짓이라고 한다. 누구는 노름에, 어떤 사람은 낚시에 미치는 것과 같다. 미친 짓 치고는 괜찮은 것이 아닌가.
●조동일 교수는…
1939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조동일 교수는 서울대 불문학과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에%8에서 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부터 2004년 8월말까지 계명대 영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그는 50여권의 저서와 200여편의 논문을 통해 국문학의 영역을 기록된 문학에서 민요와 설화 구비문학까지로, 시문학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나온 모든 기록으로 넓혀왔으며 한국문학의 발전단계를 제시했다. 2004년 9월부터 계명대 석좌교수를 맡아 학문의 원리와 방법을 탐구하는 '학문학'을 개척하고 있다.
류호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