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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죽었다/ '2004 최고 시집' 겨우 6,000부 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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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죽었다/ '2004 최고 시집' 겨우 6,000부 팔려

입력
2005.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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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작가’가 120명의 시인·평론가의 추천을 받아 지난해와 올해 연달아 ‘올해의 시인’ 수위에 올린 ‘가재미’의 시인 문태준은, 시쳇말로 문단의 젊은 스타다. 지난 해 출간된 그의 시집 ‘맨발’ 역시 시인들의 최다 추천으로 ‘2004 최고의 시집’에 뽑혔다. 그 책은 지금까지 겨우 6,000부(출판사 집계)가 팔렸다고 한다. "아이고, 그만하면 정말 많이 나간 겁니다. 그럼요. 안 그런가요?"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씨가 1976년 ‘산업화시대의 시’라는 글에서, 산업사회가 난숙기에 접어들면 시를 안 찾을 것이라는, ‘죽은 시(詩)의 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바 있다지만, 그 현실이 이러하리라는 것까지 예상했을까.

문 시인의 말처럼 시집 ‘맨발’은 ‘정말 많이 나간’ 편에 속한다. 시집부문 3위에 오른 유홍준 시인의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은 초판 2,000부 가운데 700부가 아직 창고에 쌓여있고, 6위였던 김진경 시인의 ‘지구의 시간’은 초판 1,000부 가운데 900부만 팔렸다. 4위로 뽑힌 박시교 시인의 시조집 ‘독작’도 아직 초판 1,000부를 소화하는 중이다.

물론 순위 내에 든 시집 가운데에는 나희덕, 안도현 시인 등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몇몇의 경우 1만~2만부를 넘어섰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시의 수준이나 평가가 시집 판매량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위순위 내에 든 시집 대부분이 1,000~3,000부 분량의 초판조차 채 소진하지 못했고, 끝내 소진하지 못할 시집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출판업계의 진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출판사들은 황동규 마종기 정현종 신경림 김용택 정호승 기형도 등의 스테디셀러 시집을 팔아 남긴 돈으로 신간 시집의 적자를 만회해가는 실정이다. 수 만 부씩 예사로 나가고 더러 10만부를 넘기던 ‘시의 시대’가 우리에게도 불과 10년 저쪽이었다. 94년 출간 첫 해에만 무려 30만부가 팔렸던 최영미 시인의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제목처럼 ‘시의 잔치’는 거기서 끝난 것일까.

문학평론가 정과리(연세대 국문과)씨는 이를 보편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공고해지면서 이해타산적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삶의 본질이나 의미를 찾는 경향은 쇠퇴하기 마련이죠." 대신 그는 시의 수급불균형, 시는 안 읽는데 시인은 급증하는 추세를 우려했다. "브라질 국민치고 축구선수 아닌 이가 없듯이, 우리 국민들은 모두 시인이 되려는가 봅니다. 시인들만 시집을 사줘도 지금 같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평론가 이광호(서울예대 문창과)씨는 인터넷 영향을 거론했다. "시가 시집을 통해 유통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한 편의 시로 떠다니는 시대 아닙니까. 굳이 시집을 사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덧붙여 그는 재능 있는 젊은 시인들이 보다 화려하고 경제적으로 유리한 소설이나 영상쪽으로 전향하는, 그래서 좋은 젊은 시인이 배출되지 못하는 구조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2005 오늘의 시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현대시학 9월호)

■ 평론가 2인 "詩가 회생하려면…"

-요즘 시들이 너무 자폐적이다,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푸념이 있는데.

정과리씨= 78년 이성복 시인의 데뷔 직후 그의 시를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죠. 하지만 그의 시는 80년대 내내 시의 한 전범으로 읽혔어요. 기형도의 시 역시 절대로 쉬운 시가 아니지만 그 시대 젊은 세대의 신화였죠. 물론 90년대 이후 평단이 인정하는 수준 높은 시인들의 시가 소통이 힘들 정도로 ‘개인어화(個人語化)’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시를 안 읽히게 한 원인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광호씨=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다양하지 못해서가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쉬운 시는 지금도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 시가 새로운 독자의 젊은 감수성과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현 상황이 개선되려면.

정= 정책적 접근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2000년부터 매년 4월 말 ‘시인의 봄’이라는 프로젝트를 일주일간 펼치고 있습니다. 존경 받는 시인에게 위원장을 맡겨 매년 행사를 기획하죠. 전국 거리마다 시집을 내놓고 판매하고, 시 낭송회도 열고, 전철표 뒤에 시를 인쇄해서 읽도록 하기도 합니다. 해마다 국민적 호응이 커지고 있답니다.

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기성 시단의 각성도 필요합니다. 젊은 독자들의 새로운 감수성을 충족시킬 만한 새로운 시가 나오지 않았어요. 가령 많은 기성의 시들이 90년대 이후 뿌리를 두고 있는 ‘생태 패러다임’은 대중문화적 경험에 젖어 있는 새로운 세대 입장에서는 낡은 것이죠.

최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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