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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화제/ 소설가 이순원 '고향 강릉가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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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화제/ 소설가 이순원 '고향 강릉가는 길 위에서'

입력
2005.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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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문학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하는 것이다. 그 진부하지만 자명한 격률을 대관령 아래 ‘우추리’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어령칙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강원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소설가 이순원씨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의 자궁이다. 그곳은 또 2003년 10월부터 15개월 동안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길 위의 이야기’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그가 ‘손바닥보다 작은’ 그 이야기들 가운데 두고두고 읽힐 것들을 골라 ‘은빛낚시’(이룸 발행)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10일 그와 함께 찾아간 고향 도린곁 집마당 귀퉁이에는 치워 둔 눈이 미처 덜 녹아 허리 높이로 쌓여 있고, 응달진 산길도 발목 깊이의 숫눈을 덮고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그의 눈과 손과 발과 입이 부산해졌다. "저기, 저 나무 좀 봐요. 할아버지가 심으신 아흔다섯 살 된 밤나무입니다. 아직도 밤이 열려요. 저기 저건…"

가난한 열네 살 어린 신랑이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가며 밤 닷말을 선산에 심었고, 후일 그 밤들이 숲을 이뤄 삶의 큰 밑천이 됐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된 그 ‘어린 신랑’이 어느 날 우람한 밤 숲을 가리키며 손자(이순원)에게 했다는 말이다. "저것이C 배가 고프다고 밤 한 톨을 화로에 묻는 것과, 땅에 묻는 것의 차이란다."(‘작가의 말’) 중학생이 된 작가가 학교에서 배운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이야기를 해 드리자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쪽에도 나처럼 미련한 영감이 하나 있었나 보구나."(‘밤 한 톨에 감격하는 이유’)

손가락 굵기만 하던 ‘아버지’의 산수유나무는 어른 뼘 서너 번을 돌릴 품으로 자랐고, ‘동생’이 심은 당단풍도 마당 한편을 지키고 서 있다.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와서 씨 뿌린 채송화며 분꽃이 자두 앵두 매실 복사꽃과 어우러져 봄마다 꽃대궐이에요." 거기서 그는 여름밤이면 형제들과 나란히 하늘 보고 누워 별에 곰배자리 새총자리 같은 이름들을 붙였고, 푸성귀 이고 장에 간 어머니 대신 아궁이에 앉아 연기에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가마솥 밥을 안쳤고, 오얏철이면 밥 때도 잊고 열매 익도록 나무 밑을 지키며 자랐다.

그렇게 그의 고향 집 마당은 4대(代)의 시간이, 추억과 말씀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의 다단한 기억들, 가령 고등학교 때 대관령 취로사업 갔다가 어른들과 산길을 걷던 경험이며, 집 나가 2년간 배추농사를 짓던 일 등은 소설 ‘말을 찾아서’나 ‘은비령’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등에 녹아들었다.

마당을 나서면 남쪽 능뭡굼? 타고 오솔길이 이어진다. 그는 그 산길 시오리를 걸어 중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공부하러 가는 아들 옷 젖지 말라고 앞서 걸으며 두 발과 지게 작대기로 길가 풀잎 이슬을 털어 주던 바로 그 길이다. 신작로와 만나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품속에서 새 신발을 꺼내 갈아 신기셨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올해 일흔일곱이 되셨다. "돌아보면 어머니는 내가 살아온 길 고비마다 이슬털이를 해 주셨다. 아마 그렇게 털어 주신 이슬만 모아도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어머니의 이슬털이’)

책에는 170여편의 알밤 같은 글이 가족 추억 이웃 세상 네 묶음에 나뉘어 실려 있다. 그 글 모두가 그의 문학 속 가식 없는 푸근함과 너른 품, 천진한 웃음, 아릿한 슬픔의 맥락에 칡넝쿨처럼 얽혀 있음도 자명한 일이다.

강릉=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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